판박이 주가조작 ‘하한가 5종목’ 충격 이유 세 가지 [오인경의 그·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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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박이 주가조작 ‘하한가 5종목’ 충격 이유 세 가지 [오인경의 그·말·이]
  • 오인경 후마니타스 이코노미스트
  • 승인 2023.06.19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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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부터 신용융자 중단, 주가 조작 전과자 활개… ‘라덕연 사태’ 불과 50일 만에 재연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이 말은 남다른 유머 감각을 자랑했던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비문에 써달라고 부탁한 내용이다. 비문에는 보통 한 사람이 평생 추구했던 고유한 무엇이 담기기 마련이다. 중광 스님처럼 "괜히 왔다 간다"라는 비문도 있고, 박수근 화백의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도 유쾌하지만, 버나드 쇼만큼 정곡을 찌르는 맛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의 비문을 가만히 음미해 보노라면, 우물쭈물하다가 무덤에 묻힐 때까지 정신 못 차린 사람이 여기 잠들어 있노니 부디 당신들은 정신 바짝 차리고 살라는 고마운 충고까지도 담겨 있는 듯하다.

조지 버나드 쇼 /사진=나무위키
조지 버나드 쇼 /사진=나무위키

​우물쭈물하다가 사건을 극대화한 인물 가운데 최고봉은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다. 독살당한 아버지가 유령으로 나타나 햄릿에게 진실을 알려줬을 때 선친의 뜻을 받들어 단칼에 삼촌을 해치웠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장차 장인어른으로 모실 분도 죽이지 않았을 테고, 사랑하는 오필리어도 미쳐 익사하지 않았을 테고, 오필리어의 오빠도 칼로 찔러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햄릿이 우물쭈물하는 바람에 결국 선량한 사람 여럿이 죽고 자신마저 독이 묻은 칼에 찔려죽고 만다. 햄릿은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천 명이 넘는 인물 가운데 가장 똑똑한 인물이었으나 결국 우유부단함 때문에 모든 일을 그르치고 만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사진=이미지투데이
윌리엄 셰익스피어 /사진=이미지투데이

우물쭈물하다가 일을 그르친 사람이 어찌 햄릿뿐이겠는가. 주식시장에 참가하는 투자자들 가운데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탓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수많은 투자 기회를 놓치고 나서 급등하는 주식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는 경우는 너무 흔해서 일일이 헤아리기도 힘들다. 우유부단함이 투자를 그르치는 경우는 비단 매수 기회를 놓친 경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매도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훨씬 더 중차대하다. 증시 격언에도 있듯이 ‘천장 삼일, 바닥 백일’이 주가의 기본 속성이기 때문이다. 백일 가운데 삼일에 불과할 만큼 짧은 매도 기회를 놓치고 나면? 좋은 매도 기회는 영영 다시 오지 않을 때가 많다. "매도는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매수는 수줍은 새악시처럼!" 이것이 오래된 증시 격언이다.

​최근에 한국 증시를 충격에 빠트린 사건에서는 이런 격언을 철저히 비웃는 듯한 사례가 나타나 적잖은 사람들을 당황케 했다. 불과 두 달 전쯤의 일이었다. <라덕연발 주가조작 사건>에서 나타난 여덟 종목의 장기 상승 패턴이 그것이다. 일반상식으로는 도저히 용인하기 어려운 수준의 이유 없는 주가 상승이 장기간 지속되었음에도 더 좋은 매도 기회가 무한히 연장되는 듯했다. 까닭 모를 주가 상승이 3년 이상 진행되었지만, 그 어떤 경고음도 울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돌연 여덟 종목이 동시에 하한가를 기록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수없이 많은 매도 기회를 아끼고 아껴서 폭락 직전에 기적 같은 매도 기회를 포착한 인물도 없지는 않았다. 그들은 놀랍게도 주가 조작 대상 기업의 오너들이었다! 전대미문의 초대형 주가 조작 사건다운 드라마틱한 모습에 시장 참가자들은 한 번 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8개 종목의 합산 시가총액은 최대 13조3674억원에서 지난 15일 현재 3조1431억원으로 급격하게 축소되었다. 최대치 대비로는 무려 10조2243억원이 허공으로 사라진 셈이다. 이만큼 일반적인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주가 조작 사례가 또 있을까 싶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사진=이미지투데이

참으로 놀랍게도 라덕연발 주가 조작 사건이 발생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또다시 <제2의 라덕연 사태>가 재연되었다. 이번에는 5개 종목의 주가가 약속이나 한 듯이 비슷한 시각에 하한가로 돌변했다. 두 사건에서 겉으로 드러난 차이점이라면 SG증권발 사태처럼 차액결제거래(CFD)가 급락의 원인이 아니라는 정도뿐이다. 그만큼 두 사건은 서로 닮은 꼴이었다. 이들 다섯 종목 역시 유통 주식 수가 적은 기업들을 겨냥했다. 처음부터 주가를 조종하기 쉬운 종목들만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패턴은 패턴을 낳고, 모방은 모방을 낳는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두 사건 모두 금융당국의 감시망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전략을 사용했다는 점까지 닮았다. 장기간 조금씩 조금씩 주가를 끌어올리는 전략을 사용하면 <풍경 기억 상실> 메커니즘에 따라 주가 조작 사실을 알아채기 힘들고, 주가 감시 시스템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았다. ☞본지 5월 15일자 <3년 만에 이유 없이 시총 7배… ‘수상한 급등주’ 또 있다>

5개 회사의 시가총액 변화
5개 회사의 시가총액 변화
방림 주가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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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호제강 주가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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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산업 주가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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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금속 주가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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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방직 주가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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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거래정지된 5개 종목의 경우도 <라덕연발 주가조작 사건> 못지않게 충격적이다. 왜 그런가. 첫째, <라덕연발 주가조작 사건>이 연일 대서특필되는 동안에 증권시장에서는 이미 <제2의 삼천리>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주식이 여럿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런데도 금융 감독 당국은 CFD 계좌에 대한 전수 조사와 주식 리딩방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 방침, 주가 감시 전문 조직 및 인력 강화 등을 밝혔을 뿐, 암암리에 버젓이 진행 중인 <제2의 라덕연 사태>를 일소할 만한 대책을 추진하진 못 했다. 금융감독원과 한국거래소가 사후 약방문 식의 땜질 처방에 그치지 않고 선제적으로 강력히 대응했더라면 이처럼 판박이 주가 조작 범죄는 훨씬 더 일찍 적발할 수도 있었다. 이들 5개 종목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해 12월부터 급락 위험성을 감지한 증권사들이 일찌감치 신용융자를 중단한 사실이 드러났다. 라덕연발 주가조작 사건이 터진 이후로는 말할 것도 없다. 여러 증권사가 앞다퉈 이들 종목에 대한 신용융자와 담보대출을 중단하기 바빴다. <제2의 라덕연 사태>를 지켜보면서 시장 참여자들은 다시 한번 금융 감독 당국의 무능과 안일한 대처에 분노하고 있다. 금융 감독 당국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결국 약삭빠른 주가 조작 세력들만 도와준 꼴은 아닌가. 자신들의 불법 행위가 조만간 들통날 게 불 보듯 뻔한 마당에 그들이 남몰래 고가에 주식을 처분하고 범죄 수익을 빼돌렸을 개연성도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둘째, 일반 투자자들의 주가 조작 범죄에 대한 죄의식이 지극히 낮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라덕연발 주가조작 사건>만 하더라도 피해 규모가 무려 10조원을 훌쩍 넘는다. 그런 참극을 눈앞에서 빤히 목격하고도 이번 5개 종목에 대한 주가 조작은 미동도 없이 무려 50일씩이나 더 진행되었다. 주가 조작에 대한 처벌쯤이야 겁날 게 없다는 방약무도한 태도가 이번 <제2의 라덕연 사태>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 셈이다. 이번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당사자는 이미 주가 조작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전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놓고 '투자자에 대한 모욕'을 운운할 정도다.

​셋째, <제2의 라덕연 사태>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판박이 주가 조작 사건이 50일 만에 재연됐음에도 불구하고, 장차 이와 유사한 사례가 추가로 터져 나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만큼 한국 주식시장이 혼탁한 분위기를 띠고 있으며, 주가 조작 행태 또한 파렴치하고 노골적인 면에서 역대급인데도 주가 감시 시스템은 허술하기만 하다. 각종 디지털 플랫폼의 발달에 힘입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수많은 주식 리딩방에 모여든 투기꾼들은 기업의 본질적인 가치는 도외시한 채 그저 남들보다 손쉽게 돈을 벌 궁리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토록 파렴치한 주가 조작 범죄가 만연하고 있는데도 금융 감독 당국의 대처는 여전히 미온적이고 미흡하게만 느껴진다. 우물쭈물하다가 이럴 줄 알았다는 투자자들의 탄식이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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