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어서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강태운의 빛과 그림자]
상태바
경계를 넘어서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강태운의 빛과 그림자]
  • 강태운 미술칼럼니스트
  • 승인 2024.04.25 16: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연은 경계를 모른다. 파릇파릇 돋는 새싹은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가 경계를 지을 때 사용하는 선도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경계다. 사람은 눈에 들어오는 풍경 정보를 그대로 뇌에 보내지 않는다. 일차로 정보를 가공한다. 사람은 대상을 인식할 때 우선 선을 추출한다. 이렇게 추출된 선에 대한 정보를 뇌로 보내면, 뇌에서는 그 선들이 형성하는 어떤 특별한 형상을 기억과 비교해서 대상이 무엇인지 판별한다. 사람에게 의미가 되는 기호는 선이다. 흐르는 선 세 개를 나란히 그으면 사람들은 물(水)을 떠올린다. 사람들은 자신과 세상이 만나는 경계를 단순화된 자기 형상으로 인식한다.

경계의 흔적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선(善)과 악(惡), 안과 밖, 생(生)과 사(死). 경계의 흔적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언제나 놀랍고도 흥미진진하다. 인간 역사의 존망은 이러한 경계 위에서 정해졌다. 의식 세계의 경험을 구분하는 경계부터 현실 세계에서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을 설정 짓는 한계까지, 그리고 현실과 미지의 세계를 구분하던 지평선처럼 경계는 복합적인 상징적, 물질적 함의로 인식의 범위를 넓혔다. 경계는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출발점이었다.

복합적이고 다양한 경험을 가능케 했던 경계는 콜럼버스로 대표되는 유럽 열강들의 경쟁적 신대륙 개척과 식민지 수탈 과정을 거치면서 문자 그대로 주변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장벽으로 상징되는 경계는 그 내부는 강화하고, 외부는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배제에 초점을 맞췄다. 자연스럽게 지배와 착취, 폭력은 전 세계의 경계선을 타고 형성되었다. 세계화라는 구호 아래 전 세계가 경계를 허물고 단일 공간으로 통합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세상은 다른 경계를 세워가는 중이다. 양극화로 계층 간 경계는 선명해졌고, 계층 간 이동할 수 있는 사다리는 사라졌다. 경계는 더 이상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상징이 아니라 배제를 뜻하는 대표 명사가 되었다.

오늘 소개할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역시 장식적인 미술 혹은 한국적이지는 않은 추상으로 인식되며 앵포르멜이나 단색화와 같은 다른 추상미술의 경향에 비해 주변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점과 선, 원과 사각형 등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형태, 원색의 색채,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하는 회화의 한 경향이다. 서구에서는 몬드리안, 칸딘스키, 말레비치와 같은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기하학적 추상미술이 각광을 받고, 20세기 내내 현대미술의 주요한 경향으로 여겨졌다. 국내에서도 기하학적 추상은 1920-30년대 근대기에 등장해 1960-70년대에는 전방위적으로 확산하는 등 한국 미술사의 주요 변곡점마다 각기 다른 양상으로 존재해 왔다.

장벽을 세우고 이곳과 저곳을 나눈들 하늘을 나눌 수는 없는 법이다.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주변부로 여겨졌던 경계를 인간의 오만이 낳은 배제의 상징이 아니라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만남의 장으로 거듭나게 했다. 특히 건축과 디자인 등 연관 분야와 접점을 형성하고, 당대 한국 사회의 변화와 연동되면서 한국 미술의 외연을 확장하는 역할을 해왔다.

'단성주보' 제300호 표지, 단성사, 1929년 2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및 제공
'단성주보' 제300호 표지, 단성사, 1929년 2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및 제공

영화 주보는 1920-30년대에 조선인 대상 극장이었던 단성사와 조선극장이 상영 영화와 프로그램을 소개하고자 제작한 전단이다. 영화의 인기가 급증하면서 두 극장은 홍보 전담 부서를 운영할 정도로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영화 주보도 그 과정에서 등장한 홍보 수단 중 하나였다. 주보의 표지에는 조선 영화나 서양 영화의 스틸컷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기하학적인 구성과 원색의 색면을 이용해 추상적으로 디자인한 예들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극장의 주요 고객이었던 모던 보이와 모던 걸에게 배포되었던 영화 주보에 나타난 추상 디자인은 이것이 근대적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새롭고도 세련된 이미지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김충선, '무제', 1959, 캔버스에 유채, 43×58cm, 개인 소장
김충선, '무제', 1959, 캔버스에 유채, 43×58cm, 개인 소장

김충선(1925-1994)은 1925년에 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 1956년 홍익대 서양화과 동문인 김영환, 문우식, 박서보와 ‘반(反)국전 선언’을 발표하며 개최한 《4인전》을 통해 미술가로서 활동을 본격화했다. 국전은 당대의 미술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닌 전시였지만, 여러 문제점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진원지이기도 했다. 특히 아카데미즘을 기반으로 한 구상적인 작품들을 선호했던 국전의 보수적인 성향은 미술가들의 불만을 고조하는 원인이 되었다. 국전과의 결별을 선언해 당시 미술계에서 파란을 일으켰던 《4인전》을 개최한 다음 해에 김충선은 역시 국전과 거리를 둔 채 활동하던 재야 작가들의 그룹인 신조형파에 가담했다. 이 시기에 그는 대상을 원색의 색면으로 분할하고 평면성을 강조하면서도 물감을 두껍게 발라 화면의 질감을 강조하는 작품을 제작했다.

유영국, '산', 1970, 캔버스에 유채, 136.5×136.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유영국, '산', 1970, 캔버스에 유채, 136.5×136.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유영국(1916-2002)은 1948년 해방 이후에 설립된 서울대 미술대학 도안과(디자인과) 교수로 부임했고, 이후 미술계와 디자인계가 접점을 형성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62년 미술가와 디자이너가 연대해 결성한 신상회를 주도적으로 이끈 것도 이와 같은 인연에서 비롯한다. 이 시기에 그는 점, 선, 면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조형 요소와 색을 통해 산과 바다, 태양 등 자연의 형태를 단순화면서 추상화해 가는 과정을 실험했다. 색채는 빨강, 노랑, 파랑 등 삼원색을 기반으로 하면서 보라색이나 초록색을 일부 추가해 변주해 나갔다. 유영국은 이처럼 한국의 자연을 바탕으로 한 한국적인 기하학적 추상의 세계를 창조해 냈다.

윤형근, '69-E8', 1969, 면천에 유채, 165×14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윤형근, '69-E8', 1969, 면천에 유채, 165×14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윤형근(1928-2007)은 1928년 충청북도 청주 출생으로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69-E8〉은 윤형근이 1969년 제10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품한 기하학적 추상 작품이다. 당대에 이루어진 급격한 도시화 및 건축과 미술 분야의 밀접한 관계성은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등장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윤형근은 김중업이나 김수근 등 당대의 대표적인 건축가들과 교류하며 미술과 건축의 관계성에 주목했다. 1970년대 이후 그는 청다색의 어두운 색조에 기반한 표현적인 추상 작품을 주로 제작했다. 윤형근의 1960년대 말 기하학적 추상 작품은 1970년대 이후 그의 대표작이 등장하는 데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변영원, '합존 97번', 1969, 캔버스에 유채, 91×11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변영원, '합존 97번', 1969, 캔버스에 유채, 91×11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변영원(1921-1988)은 20세기 후반의 한국 사회는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 초과학시대, 특히 원자시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어떤 물체든 원자로 이루어지듯이 이 세상의 모든 대상이 단순한 선과 색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에게는 회화의 기본 요소인 선과 색으로 이루어진 추상미술이야말로 미래의 원자시대를 대변하는 미술이었다. 그는 현대과학과 추상은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며, 특히 과학적 합리성에 기초한 기하학적 추상에서 현대미술의 새로운 조형성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80년대 투병 생활을 하면서 삶을 정리하는 마지막 시점까지도 그는 물리학과 같은 현대과학과 동양의 음양 사상을 바탕으로 우주 만물의 존재가 합일을 이룬다는 ‘합존조형론’을 만들어냈다. 변영원은 당대 한국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면서도 미래적인 미술을 꿈꾸며 자신만의 조형 세계를 성실하게 구축해 나갔다.

이승조, '핵 G-999', 1970, 캔버스에 유채, 192×111cm(3),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승조, '핵 G-999', 1970, 캔버스에 유채, 192×111cm(3),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승조(1941-1990)는 1941년 평안북도 용천 출생으로 홍익대 서양화과를 다니면서 오리진 그룹을 결성했다. 1967년 《한국청년작가연립전》에 〈핵〉 연작을 출품하며 본격적으로 기하학적 추상 작품을 선보였다. 금속의 파이프를 그린 것처럼 보이는 데다 ‘핵’이라는 제목까지 붙여진 그의 작품은, 핵발전을 동력으로 산업화를 이루었던 당대 한국 사회의 상황과 연계되어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급격하게 도시화해 가는 한국 사회의 현대적 면모를 연상시킨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60년대 말 미국의 아폴로 우주선 발사를 계기로 새롭게 우주 공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작업의 출발점이었다.

※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1920년대부터 1970년대에 국내에서 제작된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역사를 조망하는 전시로 5월 19일(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개최한다.

※ 본 글은 <방법으로서의 경계>(산드로 메자드라, 브렛 닐슨)와 전시 보도자료를 참고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