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 삶의 철학을 그리다 [강태운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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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 삶의 철학을 그리다 [강태운의 빛과 그림자]
  • 강태운 미술칼럼니스트
  • 승인 2024.06.26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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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작품 중에서 완성된 작품은 드물다. 주문 제작이어도 만족스럽지 않은 작품은 내놓지 않았다. 레오나르도는 관찰한 내용이나 아이디어를 작은 노트에 적거나 드로잉을 더 즐겼다. 현존하는 7200페이지 이상의 노트는 레오나르도가 기록한 전체 분량의 4분의 1 정도로 추정된다. 레오나르도 노트는 “종이에 기록된 것 중에 인간의 가장 놀라운 관찰력과 상상력의 증거”라 불린다. 그래서 <모나리자>나 <최후의 만찬>보다 레오나르도 노트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이 미완성의 완성이라고 부르는 <모나리자>는 마침표를 찍은 작품이라기보다 드로잉 과정의 한 지점이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모나리자>를 밀라노와 로마, 그리고 인생을 마감한 프랑스로 들고 다니며 조금씩 다듬었다. 자그마치 10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레오나르도는 미완의 작품 앞에서 팔짱을 낀 채로 하루 종일 사색하는 일이 더 많았다.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세상은 일상에 가려 인지하지 못했다 뿐이지, 다양한 문제로 아우성쳤다. 회화란 화가가 세상에 던지는 문제의식의 표현이다.

현재 우리는 다양한 매체의 발달로 수많은 정보를 여과 없이 수용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숏폼(Short-form) 콘텐츠가 유행으로 다양한 정보를 빠르게 소비하거나 축약하기를 원한다. 영상미디어는 비판적, 의식적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고 내부로 수용된다. 자극적이고 스토리텔링이 명확한 콘텐츠에 익숙해지면 나를 돌아볼 시간과 기회는 점차 축소된다. 수동적인 환경은 사고의 폭을 좁힌다. 영상미디어에 비해 예술과 철학은 비판적, 의식적 사고가 필요하다. 정답이 없는 대상과 상황에 대해 지속적으로 질문하고 의심하면서 생각의 힘을 키운다.

비판적, 의식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힘의 원천은 어디일까? 문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문제를 정의하는 일과 문제를 푸는 일로 나뉜다. 문제를 찾는 데 필요한 역량은 추상력이다. 복잡한 일을 핵심만 단순하게 구조화해야 한다.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 문제만 제대로 정의해도 절반은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를 푸는 일에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문제 상황을 만나면 그간 경험을 통해 터득한 방법으로 대처한다. 자기가 알던 방법으로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당황스럽다. 그제야 어디서부터 일이 어그러졌는지 되짚어간다. 알고 보니 풀이 과정도 정답도 모두 바뀌었다. 시대가 바뀌는데 과거 방식만 고수해서는 문제를 풀어갈 수 없다. 현실을 반영한 상상력이 필요한 순간이다.

레오나르도의 노트를 보면 그의 추상력과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노트처럼 회화에서 추상력과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과정이 드로잉이다. 드로잉에는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 의심해 보려는 의식과 용기가 담겼다. 삶에 완성된 순간은 없다. 떨림이 멈춘 정지의 순간은 어쩌면 모든 게 끝나는 순간일 것이다. 삶은 과정이듯, 드로잉은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떨림으로 존재한다.

회화의 본질은 조형성에 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내용과 형식이 조화로운 조형은 전달력이 높다. 다른 한편으로 바탕이 있어야 그림을 그릴 수 있기에 회화의 본질은 바탕, 즉 평면성에 있다는 의견도 있다. 지금 소마미술관을 방문한다면 그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회화의 본질은 드로잉에 있다.”

드로잉에는 삶의 과정이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철학과 사유가 필요한 시대, 예술가의 드로잉 속에서 삶의 진리를 찾아보자. <드로잉, 삶의 철학을 그리다>는 긴 시간 예술가로 활동해 온 작가들이 깨달은 삶에 대한 고찰을, 드로잉이라는 매체를 통해 발견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를 위해 기본 30년 이상의 시간을 예술가로 활동하며 작품세계가 명확하게 구축된 중견 이상의 작가를 선정하여 그들의 발자취를 조망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작가의 철학이 드러나도록 했다.

유근택, 편지-또 다른 오늘, 32x68cm, 혼합재료, 2020 (81개)
유근택, 편지-또 다른 오늘, 32x68cm, 혼합재료, 2020 (81개)

유근택 작가는 인간의 내면에 관한 관심을 바탕으로 개인의 삶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또 다른 오늘〉은 2021년부터 2022년 사이 10개월간, 임종을 앞둔 아버지에게 매일 같이 보냈던 그림 80여 점을 엮은 작업이다. 코로나19로 요양병원에 면회가 금지된 상황에서 작가는 오직 시각 이미지로만 아버지에게 마음을 전해야 했다. 이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임과 동시에 한 인간의 존재와 소멸에 대한 성찰이다.

강미선, 나의 서가도, 1,162x375cm, 종이 위에 먹_혼합재료, 2024
강미선, 나의 서가도, 1,162x375cm, 종이 위에 먹_혼합재료, 2024

강미선 작가는 오랜 시간 수행적인 자세로 한지와 먹이라는 한국적인 재료의 본질을 탐구해 왔다. 자신의 삶을 둘러싼 풍경과 사물을 명상적인 과정과 함께 묵묵히 쓰고 그린다. 종이를 두드려 한지 표면의 물성을 살리고, 먹을 얕게 쌓아 농담을 조절하는 지난한 과정은 구도자적인 면모와도 맞닿아 있다.

〈나의 서가도〉는 소반, 장독, 문창살 등 집을 통해 펼쳐진 일상의 부분을 포착한 작품이다. 또한 작가는 관심(關心)이라는 태도를 강조한다. 볼 관, 마음 심. 즉,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려면 쓸데없는 것, 거추장스러운 것, 얽혀있는 것을 걷어내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사람과 사물 그리고 작업을 대하는 작가의 진중한 자세를 통해 삶의 진리를 엿볼 수 있다.

김명숙, 작가 만다라 연작, 196x125cm, 종이 위에 혼합재료, 2024 (24개)
김명숙, 작가 만다라 연작, 196x125cm, 종이 위에 혼합재료, 2024 (24개)

김명숙 작가는 자신을 비롯한 다양한 인간의 실존적 사유와 관찰의 결과를 드로잉과 회화로 표현해 왔다. 청주 산막리 산골에 작업실을 둔 작가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동굴벽화를 그리듯 거대한 종이 위에 쉴 새 없이 드로잉을 이어간다. 펜이나 붓을 사용하지 않고 수세미와 손가락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계를 온몸으로 표현한다. 종이가 닳도록 거듭해서 그려진 드로잉은 욕망의 분출이자 지난한 탐구의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의 〈작가 만다라〉 연작은 작가가 작업에 임하는 태도를 지속해서 다지게 해준 이들에 대한 헌정 작업이다. 미켈란젤로, 카라바조, 렘브란트, 고야, 터너, 페르메이르, 밀레, 세잔. 모네, 고흐, 콜비츠, 베이컨, 프로이트까지 작가는 선대 예술가들의 역사에서 작업을 진전시켜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을 얻었다.

이배, 불로부터-2, 2600x1300cm, 소나무숯_검정끈 묶음, 2010
이배, 불로부터-2, 2600x1300cm, 소나무숯_검정끈 묶음, 2010

이배 작가는 30여년의 시간 동안 한국과 유럽을 오가며 ‘숯’을 주재료로 다양한 작품을 선보여 왔다. 작가는 숯을 불순물이 사라진 가장 순수한 상태로 보았다. 숯은 나무가 탄화되어 연료가 되거나 살균 및 해독작용으로 주변을 정화시킨다. 따라서 숯에는 에너지와 생명력이 응축되어 있다. 또한 숯은 오래된 나무를 태워 만드는 만큼 오랜 시간성을 머금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2.6미터 높이의 대형 숯덩이를 배치하여 물성 자체가 선사하는 힘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뒤편의 드로잉 작업으로 이어진다. 먹을 만드는 재료가 숯이기도 하지만, 먹은 한국의 정신성이 가미된 전통적인 재료다. 그리고 붓질에서는 온몸의 에너지를 담아낸 신체성을 읽을 수 있다. 결국 작가의 드로잉은 정신성과 신체성의 결합이다.

※ <드로잉, 삶의 철학을 그리다>전은 소마미술관 개관 20주년 기념 특별전으로, 올해 8월 25일까지 진행된다.
※ 본 글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윌터 아이작슨)와 전시 보도자료를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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