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이팅은 몸에 쌓는 신뢰다 [강태운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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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이팅은 몸에 쌓는 신뢰다 [강태운의 빛과 그림자]
  • 강태운 미술칼럼니스트
  • 승인 2024.03.25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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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레이번, 스케이트 타는 목사, 1795
헨리 레이번, 스케이트 타는 목사, 1795

몸은 이곳에, 시선은 저 멀리. 싱그러운 겨울날 <스케이트 타는 목사>는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그림이다. 주인공은 로버트 워커(Robert Walker), 에든버러 소속 성직자이자 스케이팅 클럽 회원이다. 사랑받는 그림에는 저마다 이유가 있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개장하면 관람객들은 한 곳을 향해 줄지어 뛰어간다.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이 있는 2층 미국관을 향해서다. 조지 워싱턴이 혹독한 추위와 얼음을 뚫고 늠름하게 강을 건너는 장면이 거대한 화폭에 담겼다. 조지 워싱턴은 불굴의 의지와 솔선수범으로 독립을 이끈 미국의 국부이자 초대 대통령이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은 당연히 <모나리자>다. 몰려드는 관람객으로 공간은 순식간에 시장통으로 변하지만, 리자 부인은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지을 뿐이다.

엠마누엘 고틀립 로이체,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 1851
엠마누엘 고틀립 로이체,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 1851

<스케이트 타는 목사> 그림은 대대로 로버트 목사 후손들의 집에 숨겨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림의 존재를 잊었고, 그림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경제가 어려워진 1926년, 목사의 증손녀는 이 그림을 700파운드 헐값에 팔았다. 또 다른 긴축 시기에 다시 시장에 나온 그림을 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이 단돈 525파운드에 사들였다. 무시당했던 세월이 무색하게 지금은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이 되었다. <스케이트 타는 목사>는 그림의 본질 중 어떤 것을 담았기에 최고의 지위에 올랐을까?

도시는 신호에 따라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거대한 기계 세상이다. 복잡한 도심에서 막힘없이 흘러가는 일은 색다른 경험이다. 숨 막히는 세상살이에 물 흐르듯 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자연스러운 세상 일부로 수용 받는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야외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한 서울시청 앞 광장에 아이들보다 성인들이 더 눈에 띈다. 몸은 말을 듣지 않더라도, 마음만은 저 멀리 띄워 보내고 싶었던 거다.

스케이팅은 넘어지는 연습이 중요하다. 균형을 잃었을 때, 제대로 넘어져야 다치지 않는다. 올바른 자세와 미끄러지듯 가고 멈추는 법을 배운다. 수십 번 엉덩방아를 찧고 몇 번 타원을 그리면 스케이트장을 활보할 수 있다. 처음 타는 사람에게 잠시나마 쑥 나아가는 느낌은 쾌감 그 이상이다. 체중을 앞에 싣고 한쪽 발을 밀어 가속도가 없어질 때까지 미끄러지면, 그것이 자기 의지가 아니더라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시원함을 준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미끄러지는 과정은 자기 몸에 믿음을 짓는 과정이다. 링크를 도는 동안 자신에 대한 신뢰가 몸에 쌓이고, 온전히 자신을 수용해 간다.

마음은 나누는 것이다. 인류는 마음을 나누는 공감과 협력 방식으로 수만 년 힘든 역경을 헤치고 인간종으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렇다고 상대방이 당면한 문제를 죄다 이해하고 도와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그 사람의 삶을 살아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개별 인간이기에 경험하는 모든 상황을 말로 표현하고 공유할 수는 없다. 최고의 방편은 신뢰다. 한발 물러서서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이다. 아들아, 너를 믿는다.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아빠는 네 편이다. 누군가의 믿음을 받는 사람은 잘못된 길로 들어서더라고 근저에 깔린 신뢰를 떠올리며 제자리로 돌아올 힘을 생각한다.

스케이팅이 스스로 자기를 신뢰하는 과정이라면 캐치볼은 상호 간에 신뢰를 쌓는 운동이다. 캐치볼은 공을 주고받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공을 던지는 일은 마음을 건네는 일종의 행위예술이다.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묵직하게 감정이 실린다. 공을 받는 일은 상대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과정이다. 별생각 없이 주고받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서로의 마음을 연결하는 장치가 캐치볼 어딘가에 숨어 있다. 캐치볼은 던진 볼이 돌아오지 않거나, 받은 볼을 던지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 물 흐르듯이 주고받는 사이클을 반복한다. 주고받는 당연한 일이 일상으로 돌아가면 특별해진다. 일방적인 강요에 받기만 하거나, 받았지만 차마 던질 수 없는 상황이 다반사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느낌, 자신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경험은 사람의 마음 근육을 키운다.

주위에서 공격적이고 충동적인 아이를 접한다. 사랑과 관심에 전문적인 치료를 보태면 아이는 훨씬 밝은 모습을 찾게 된다. 여기서 치료란 공격적인 아이를 얌전하고 순종적인 아이로 바꾸는 개념이 아니다. 건강한 공격성, 즉 외부 자극에서 자기를 지킬 힘을 키우면서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아이로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다. 아이들은 시끄러운 스마트폰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영상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서 받아들이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다.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처음부터 완성까지 자기 주도로 경험한다면, 아이는 한 바퀴를 돌아본 것만으로 자신이 수용되었다는 생각을 갖는다.

트랙은 몇 바퀴를 돌아야 비로소 원인지 타원인지 알 수 있듯, 아이는 반복적으로 전체 과정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 조절의 힘을 키운다. 점점 타협과 양보를 생각할 심적 여유가 생긴다. 스포츠 예찬이 아니다. 스케이팅과 캐치볼로 시작했지만, 우리가 접하는 춤, 음악, 그림 같은 예술은 마음을 나누고 창조적 상상이 가능한 사유 방식이다. 그림 앞에 선다는 것은 그림과 내가 공을 주고받으면서 온전히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금세공 견습생이었던 헨리 레이번(Henry Raeburn, 1756~1823)은 젊은 시절부터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다. 세밀화를 그리기도 했지만, 초상화에서 두각을 보였다. 레이번은 사전 스케치 없이 캔버스 위에 바로 그림을 그렸다. 인물을 조명 앞에 세우고, 조명을 세밀하게 조절하여 뚜렷한 명암의 대비를 주었다. 밝음과 어둠이 서로를 대비시키면서 인물에 극적 효과를 끌어냈다. 초상화 인물들은 인생의 정점을 한순간에 집약한 것처럼 호소력 짙은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살아 숨 쉰다.

헨리 레이번 자화상, 1815
헨리 레이번 자화상, 1815

저명한 초상화가로 원숙미가 넘쳤던 시기에 레이번은 그의 작품세계와 다른 초상화를 한 점 그렸다. 실내에서 인물 분위기를 강조했던 기존 그림과 달리 <스케이트 타는 목사>는 구성과 설정 모두 특이하다. 우아하고 자유로운 몸짓에 방점을 찍은 그림은 예측 불가능한 블랙 스완 같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빈센트 반 고흐 그림처럼 누구나 아는 그림은 아니지만, 한 번 보면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다.

레이번이 왜 목사님의 독특한 초상화를 그렸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로버트 목사는 유언장에 자기 재산을 관리할 수탁자 중 한 명으로 ‘에든버러의 초상화 화가 헨리 레이번’을 지목했다. 두 사람이 오랜 기간 친분을 쌓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들이 함께 스케이트를 탔다는 증거는 없지만, 레이번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활기찬 사람이었다. 바람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두 팔을 가슴에 걸쳐 접은 상태에서 한 발로 균형을 유지하는 동작은 스케이터가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 거리를 갈 수 있도록 고안된 자세다. 레이번은 근엄한 사제복을 입은 목사님이 우아하게 스케이트 타는 모습을 보았고, 그 광경에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로버트 워커는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네덜란드에서 살았다. 당시 겨울은 지금보다 혹독했고, 네덜란드를 거미줄처럼 연결한 운하와 수로는 자주 얼어붙었다. 일상생활은 얼음 위에서 이뤄졌고 스케이트는 신발이나 마찬가지였다. 네덜란드는 지금도 빙상 강국이다. 로버트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그림에 보이는 더딩스턴 호수에 올랐을 때, 그의 스케이팅 실력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로버트 목사는 젊은 나이에 혼란에 빠진 크래몬드 교구를 돌보라는 요청을 받았다. 크래몬드는 에든버러 근교에 있다. 교구는 중심을 잃은 지 오래되었고, 교구 시설은 황폐한 상태였다. 교구민들 사이에 불신이 만연했다. 분명 어려운 처지였을 것이다. 로버트 목사는 에든버러에 있는 스케이팅 협회에 신청서를 넣었다. 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폭넓게 관계를 맺어 자기 교구의 문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고자 했다. 물 흐르듯 미끄러지는 느낌은 쌓인 스트레스를 녹여주었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면서 다시 일상을 살아낼 힘을 얻었다.

초상화에는 인물의 자의식(自意識)이 담긴다. 평생 목사로 살았던 로버트의 자의식이라면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약자를 섬기는 모습에서 드러날 터였다.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을 그리자는 엉뚱한 아이디어는 누구에게서 나왔을까? 화가 이전에 친구였던 레이번일 가능성이 높다. 레이번은 오랜 친구를 근엄한 사제복을 입은 목사로 그리고 싶지 않았다. 물 흐르듯 얼음 위를 질주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자기 초상화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로버트 목사가 눈에 선하다. 스케이팅은 몸에 쌓는 신뢰다. 자유로운 몸짓이자 사랑이 담긴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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