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 ‘동쪽에서 부는 바람, 서쪽에서 부는 바람’ [강태운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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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동쪽에서 부는 바람, 서쪽에서 부는 바람’ [강태운의 빛과 그림자]
  • 강태운 미술칼럼니스트
  • 승인 2024.01.25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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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사람은 변한다. 크나큰 계기를 만나면 사람은 변한다. 어느 시점부터는 나이가 늘어도, 큰 계기를 만나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나이라는 시간과 계기라는 원인은 변화와 밀접해 보이지만 핵심은 아니다. 진실한 변화는 내적 욕망과 자기 부정에서 시작한다. 정상에 서고 싶은 욕망은 변화를 부채질한다. 이미 원숙한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 욕망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현재의 자기를 부정해야 혼란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다. 세상사 변하는 것이 순리다. 내밀한 욕망을 동력으로 삼고, 통렬한 자기 부정을 방향으로 삼아야 삶은 변한다.

고암(顧庵) 이응노는 똑같은 그림을 두 번 그리지 않았다. 한두 가지 대표적 스타일을 반복해서 그리는 인기 화가들과 다르게 이응노의 변화는 무궁무진하고 거침없었다. 1976년 신세계미술관 개인적 도록에 자신의 예술세계 변화 과정을 시기순으로 구분해서 적었다.

“내가 그림을 시작한 것이 벌써 70년이 되었다. 그 지나온 70년을 되돌아보니, 소년기의 자유자재했던 시절을 제하고 약 10년을 주기로 하여 6번으로 나누어져 변화하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20대를 우리나라 전통의 동양화와 서예적 기법을 기초로 한 모방 시기라고 하면 30대는 자연 물체의 사실주의적 탐구 시대, 40대는 반추상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 사실에 대한 사의적(寫意的) 표현 그리고 50대는 구라파로 와서 추상화가 시작된다. 그로부터 오늘까지를 다시 나누어 10년을 사의적 추상이라면 후기 10년간을 서예적 추상이라고 이름 지어 보겠다.”

이응노는 전통적 사군자로 시작해서 전위적인 추상화까지 동서양의 미술을 두루 섭렵한 작가다. 이응노가 여섯 번이나 자신의 예술세계를 변화시킨 욕망과 자기 부정은 어디서 기인했을까? 1903년에 태어난 이응노는 태어나서 사십 년을 일제 치하에서 살았다. 이후 10년을 해방 정국의 혼란과 한국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았다. 외세의 현대화 된 힘 앞에 갈등과 좌절의 한을 겪어야만 했다. 현대는 지금의 시대를 말한다. 사상이나 성질이 지금 시대의 보편적 인식과 맥락이 통하면 현대적이라고 일컫는다. 이응노는 지금 현재를 살았지만, 현대에 사는 것 같지 않았다. 이응노는 화가로서 우리 민족미술을 새로운 표현으로 현대화하고, 국제화하는 데 전 생애를 걸었다.

“나는 특히 한국의 민족적인 추상화를 개척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동양화에서 선線, 한자나 한글에서의 선, 삶과 움직임에서 출발하여 공간구성과의 조화로 나의 화풍을 발전시켰지요. 한국의 민족성은 특이합니다, 즉 소박, 깨끗, 고상하면서 세련된 율동과 기백 –이 같은 나의 민족관에서 특히 유럽을 제압하는 기백을 표현하는 것이 나의 그림입니다.” (중앙일보, 1972.12.5.)

이응노는 19세에 선전(鮮展)에 <청죽>으로 입상한 이후 7년간 낙선했다. 어느 봄날 몰아치는 비바람에 술렁거리며 이리저리 쓰러지는 대밭의 모습을 보며 강한 충격을 받았다. 풍죽(風竹)이라면 바람에 댓잎이 한쪽으로 쏠려있는 것으로 배웠는데, 전혀 다른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며 살아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이응노는 답습에 매달리고, 창작성이 부족했던 자기의 현실을 깨달았다. 이응노는 어제 그린 그림이 부끄러워 오늘 다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그려봐야 자신의 현재를 살필 수 있다. 한번 그린 작품은 작가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응노는 생전에 10,000점 가까운 작품을 남겼다. 다른 화가들과 비교하면 다작(多作)이다. 이응노의 다작은 자기 부정의 산물이었다.

대죽, 1932, 종이에 먹, 161.5×68cm
대죽, 1932, 종이에 먹, 161.5×68cm

이응노는 1958년 55세에 도불(渡佛)전을 마지막으로 파리로 떠났다. 프랑스 생활 30년에도 불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더군다나 동양미술학원을 개원하고 3천 명이 넘는 유럽 사람들에게 제자로 둔 스승이었다. 이응노는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선승의 고행에 농밀하게 아름다운 불어가 불편했던 것일까. 사람의 정신과 민족의 얼은 사용하는 말과 글 속에 깃든다. 서양 사람을 닮아가면서 그들과 경쟁할 수 없는 일이다. 이응노는 파리 한복판에서 유창한 충청도 사투리를 썼다.

“난 파리에 싸우러 가네.” 만리타향 파리는 소리 없는 총성이 난무하는 현장이었다. 함께 간 아내와 아이 말고는 죄다 고향과 달랐다. 이응노는 자신의 전위적 예술세계와는 다르게 평생 묵으로 대나무를 그렸다. 시작은 먹을 가는 일이었다. 아픈 사람처럼 먹을 가볍고 잡고 먹을 갈았다. 묵향만은 고향과 같았다. 그 향기로 춤추는 듯한 대 잎사귀를 그리면 바람이 불었다. 바람을 타고 묵향은 방안에 그윽했다. 현대미술의 도전이 전례 없이 밀려드는 상황에서 방향감을 잃지 않으려고 이응노는 지紙·필筆·묵墨에 대한 경험을 몸에 새기듯 이어갔다. 그것은 반만년 역사를 지탱해 온 우리의 정신을 지키는 일이면서, 서양에 도전하는 시작점이었다.

이응노는 각기 의미가 있는 필선들이 모여 새로운 조형을 완성하는 문자 추상을 선보여 전통 서예를 현대적 예술표현으로 승화시켰다. 한자는 자연의 형태를 빌린 것이고, 한글은 음과 뜻을 형태로 표현한 것이기에 글자 자체가 추상적 표현이 된다. 이응노의 문자 추상은 문인이자 서예가로서 자신이 이미 하고 있었던 것들을 압축한 조형 시도였다. 서(書)는 줄긋기와 임서(臨書)라는 학습 과정을 중시한다. 답습과 반복이 필연적이다. 서(書)는 그 자체가 공부면서 놀이이고 수양이다. 이런 과정이 탄탄하게 기본 토대가 갖춰졌을 때 서예의 현대성은 빛을 발한다. 인간의 자의식은 그림과 씨름하는 과정 속에 담긴다. 과정이 생략된 추상은 장식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이응노는 파리에서 눈부신 예술적 성공을 이뤘다. 미술평론가 프랑소와 쁠뤼샤아르는 이응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응노는 유럽 회화에 새로운 비전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많이 알려진 혹간의 일본 예술가들 경우처럼 입에 침바른 손재간 노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허(虛)가 곧 충일(充溢)이요, 충일이 곧 허일 수 있는, 이 정신 상태를 서구적 표현 양식을 빌려 재생해 낸 것이다.”

구성, 1979, 캔버스에 끈과 종이 콜라주, 63.8×50.8cm
구성, 1979, 캔버스에 끈과 종이 콜라주, 63.8×50.8cm

1970년대 이응노는 여러 지역의 고대 문자를 이용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집트 상형문자, 아프리카 원시 문자, 중국의 고대 갑골문자와 한자, 아랍문자 그리고 한글까지 포함된 전 세계 다양한 문자들이 그의 작품 속에서 서로 결합하고 해체되며 여러 가지 형상으로 재창조되었다. 화면 속 문자들은 문자-기호의 뜻과는 상관없이 미적 요소로서 존재한다. 이응노는 문자를 이용한 자신의 작품을 ‘서예적 추상’이라고 불렀다.

이 시기 작품들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재료를 사용했다. 솜, 양털, 융, 부직포, 삼베, 모직 등을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하였고 이렇게 제작된 작품들은 마치 벽에 거는 양탄자와 같은 인상을 남겼다. 작품 〈구성〉은 거친 질감의 바탕 천에 같은 색감의 종이를 뜯어 붙인 후 종이를 꼬아 만든 노끈으로 형상을 만들었다. 바탕색과 종이, 노끈의 색이 어우러지면서 은은한 아름다움을 풍긴다.

구성, 1970년대 후반, 종이에 과슈, 80×98cm
구성, 1970년대 후반, 종이에 과슈, 80×98cm

화려한 색채와 기하학적인 형태들이 강렬한 인상을 주는 1970년대 후반의 〈구성〉은 작가의 변화를 잘 드러낸다. 원색과 평면적인 배경 구성, 굵은 윤곽선으로 둘러싸인 도형들은 수묵화가 이응노의 또 다른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준다. 세 명의 사람이 하나의 거대한 날개를 지닌 형상은 이응노의 작품에서 ‘가족’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가 자신과 부인, 그리고 아들이 함께 등장하는 이 도상은 한자 ‘좋을 호(好)’에서 발전하였다. 원색이 주는 밝고 화사한 느낌이 가족의 따뜻함을 훌륭하게 시각화하고 있다.

군상, 1983, 종이에 수묵, 97.1×67.6cm
군상, 1983, 종이에 수묵, 97.1×67.6cm

1980년대 이응노의 그림 속에는 수많은 인간이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모습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친 사람, 온몸을 힘껏 열어 젖인 사람, 높이 뛰어오는 사람, 그리고 서로 손을 잡고 달려가는 사람들 등이 나타났다. 하나하나가 모여 어느새 화면을 가득 메우는 거대한 무리를 이룬다.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이들 무리는 마치 파도와도 같은 리듬으로 요동치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군상〉시리즈는 이응노의 마지막 변모이자 백조의 노래처럼 모든 것을 쏟아부은 작품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이 저마다가 속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연상한다는 점이다. 한국 사람들은 민주화 운동을 떠올리지만, 유럽 사람들은 반핵운동이나 반전(反戰) 시위를 그린 것으로 이해한다. 이제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축제를 연상한다. 〈군상〉에는 기쁨의 노래가 담겨 있고 보는 이들에게 웅장함을 선사한다.

※ <이응노, 동쪽에서 부는 바람, 서쪽에서 부는 바람>전은 이응노 탄생 120주년을 맞이하여 국립현대미술관과 이응노미술관이 공동 기획한 전시로 3월 3일까지 이응노미술관에서 진행됩니다.

※ 본 글은 『고암 이응노, 삶과 예술』(고암미술연구소), 『ungno lee』(국립현대미술관), 『32인이 만나본 고암 이응노』(박서보 외), 『이응노 대나무 그림전』(이응노미술관)와 전시 보도자료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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