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덕연’으로 재발한 금융사기, 돼지는 도축될 뿐이다 [오인경의 그·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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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덕연’으로 재발한 금융사기, 돼지는 도축될 뿐이다 [오인경의 그·말·이]
  • 오인경 후마니타스 이코노미스트
  • 승인 2023.05.30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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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시장에서 벌어지는 사기극은 일단 터지고 나면 그 취약한 허구성에 다들 놀라게 된다. 암스테르담에서 증권시장이 개설된 이래 수많은 주가 조작 사건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지만, 어느 하나라도 치밀한 각본과 탄탄한 구조를 갖춘 멋진 연극 같은 면모를 보여준 경우는 없었다. 사건이 만천하에 다 드러나고 나면 너무나 쉽게 사기극에 속아 넘어갔다는 생각에 다들 어이없어하면서 혀를 차게 된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사진=이미지투데이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21세기에 와서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단순하기로 따지자면 빈집털이범의 행각보다도 더 쉬워 보이는 각종 보이스피싱 범죄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토록 단순한 사기극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시시각각으로 속아 넘어가는가를 생각해보면 기가 막힐 일이다. 라덕연 일당들이 장기간에 걸쳐 차곡차곡 쌓아 올린 끝에 10조원이 넘는 규모의 허장성세를 자랑했던 사상누각은 또 얼마나 참담하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던가. 그런 뻔한 사기 수법이 챗GPT를 비롯한 인공지능이 고도로 발달한 디지털 혁명 시대에 와서까지도 버젓이 통한다는 건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인간의 지능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속임수를 끊임없이 진화시켜 온 때문인가. 아니면 탐욕에 눈이 먼 어리석은 사람들 때문인가.

/사진=이미지투데이
/사진=이미지투데이

피터 왓슨이 쓴 『생각의 역사』에는 '생각의 진화'에 관한 재미있는 사실이 담겨 있다. 인류는 자그마한 돌조각을 도끼처럼 사용하면서부터 비로소 두뇌의 용량이 비약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장 오래된 '돌 조각' 유물은 약 270만 년 전 에티오피아의 고나 강변에서 발견됐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은 주로 채식을 했고, 두뇌의 용적 또한 지금보다는 훨씬 더 작은 원시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16∼17세기 탐험의 시대에 아메리카, 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에 사는 수렵-채집 부족들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석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돌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동물에 비해 '돌'을 사용할 줄 알았던 우리 조상이 그 자그마한 차이로부터 '생각의 진화'를 시작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초기 인류가 '도끼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은 대략 지금으로부터 약 70만년 전이라고 한다. 인간이 불을 처음 사용한 시기였던 142만년 전으로부터 따지면 무려 70만년 이상이나 더 지난 때다. 그 뒤로 인간은 '사냥을 통한 육식'이 가능해지면서 두뇌를 키울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직립 보행 덕분에 인간은 턱의 구조가 바뀌고 혀의 정교한 놀림이 가능해져 언어에 필요한 여러 가지 소리를 낼 수 있었다고 한다. 돌도끼의 사용은 결국 사냥한 동물의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한 이빨의 크기까지도 점차 줄이게 되어 언어의 발달에 더욱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되고, 집단생활에 따른 의사소통의 발달은 결국 생각을 '공유'하는 데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생각의 역사』 /사진=오인경
『생각의 역사』 /사진=오인경

인간에게서 다른 동물들을 매우 능가하는 지성은 인간의 무한한 욕구에 비례하여 빠르게 진화했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타고난 무기가 턱없이 부족하고 크기가 비슷한 다른 동물들보다 근력도 부족하고 도피에도 무능하다. 달리기에서는 거의 모든 네 발의 포유동물보다 뒤진다. 또한 인간은 느린 번식, 긴 유아기, 긴 수명을 지니므로 그와 비례해서 지성을 발달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연계에서 최고로 지능적인 동물로 진화했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 비극시인도 이 점을 간파하고 '인간의 위험천만한 위대성'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많다 하여도
사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네.
사람은 사나운 겨울 남풍 속에서도
잿빛 바다를 건너며 내리 덮치는
파도 아래로 길을 연다네. ……

​그리고 마음이 가벼운 새의
부족들과 야수의 종족들과
심해 속의 바다 족속들을
촘촘한 그물코 안으로 유인하여
잡아간다네. 총명한 사람은. ……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중에서

소포클레스. /이미지=픽사베이
소포클레스. /이미지=픽사베이

​온갖 도구들을 사용하여 육해공의 날랜 짐승들과 물고기와 새들을 잡는 능력을 갖춘 인간은 결국 남을 속이는 거짓말과 속임수와 기만술까지 두루 갖추게 된다. 그토록 자주 일어났던 전쟁 하나만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 함정과 기만술과 스파이가 등장하는가. 그래도 고대의 이름난 사기극에는 온갖 악취만 풍기는 현대의 금융 사기에 비해 낭만적인 면모가 있었다. 무려 3000번의 여름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겨우 만나볼까 말까 한 까마득한 옛날, 트로이아 벌판에서는 10년째 처참한 전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지리한 전쟁에서도 최후의 승패를 가른 것은 결국 속임수였다. 꾀 많은 오딧세우스가 거대한 목마 속에 자신의 병졸들을 숨겨놓을 때까지는 도무지 단단한 트로이아 성벽을 함락시킬 방법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트로이 목마. /사진=픽사베이
트로이 목마. /사진=픽사베이

​트로이아의 병사들은 퇴각한 그리스군이 남겨놓은 듯한 거대한 목마를 전리품으로 여기고 성벽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때 예언의 능력을 지닌 카산드라 공주가 기겁을 하며 그들을 만류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프리아모스 왕의 딸 중에도 가장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덕분에 한때 아폴론의 사랑을 받아 예언 능력까지 부여받았으나 끝내 아폴론의 사랑을 거절하는 바람에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아폴론의 저주를 받아 '설득력'을 잃어버린 불행한 공주는 자신의 조국이 패망하는 걸 지켜보는 것으로도 모자라 전쟁이 끝난 후에는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첩이 되어 그리스 땅으로 끌려가는 신세로 전락한다.

​"아폴론이여, 아폴론이여, 길의 신이여, 나의 파괴자여,
당신은 나를 두 번이나 완전히 죽이시는군요."

-아이스퀼로스, 『아가멤논』 중에서

​미심쩍은 트로이아의 목마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보낸 사람은 카산드라 공주 말고도 더 있었다. 포세이돈 신전을 지키는 대사제 라오코온이었다. 그는 트로이아 사람들에게 목마를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경고하다가 그리스를 편드는 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바다에서 나온 거대한 뱀에 휘감겨 목숨을 잃고 만다. 트로이아가 함락된 후 불타는 성에서 겨우 빠져나와 망명길에 오른 아이네이아스는 오딧세우스의 계략에 속아 넘어간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통탄하면서 이렇게 노래한다.

그때 라오코온이 수많은 무리가 뒤따르는 가운데
앞장서서 성채 위에서 쏜살같이 뛰어내려오며
멀리서 외쳤습니다. '오! 가련한 동포들이여,
그대들은 그토록 제정신이 아니란 말이오? 그대들은 적군이
배를 타고 떠난 줄 아시오? 일찍이 다나이족의 선물에
음모가 없었던 적이 있나 생각해보시오.
그대들은 오딧세우스를 그런 사람으로 알고 있었소?
이 목조물 안에 아카이오이족이 숨어 있거나,
우리의 집들을 들여다보고 위에서 시내로 내려와
우리의 성벽들을 공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거나
아니면 어떤 다른 계략이 숨어 있음에 틀림없소. 말(馬)을 믿지 마시오,'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제2권 40∼56행

무릇 의심스러운 음모가 꾸며지는 동안에는 더러 그 진행 과정에서 발각될 위험이 잠깐씩 노출되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브루투스도 불세출의 영웅인 카이사르를 암살하기 직전까지 수많은 밤을 번민으로 보내야 했다. 밤마다 잠 못 드는 남편을 이상하게 여긴 아내가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재촉했다. 자신이 공유하게 될 비밀을 얼마만큼 굳세게 지킬 자신이 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날카로운 가위로 자신의 허벅지까지 찌른 끝에 꺼낸 말이었다. 브루투스는 아내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고, 엄청난 거사가 성공할 때까지 음모는 끝내 발각되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역사가였던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도 가장 유명한 <음모에 대하여>라는 장에서 이 유명한 거사에 대해 각별히 고찰한다. 그는 역사상 대부분의 음모는 실패했으며, 밀고의 위험성 때문에 오래 끌어서도, 가담자가 3∼4명 이상이어서도 성공하기가 몹시 어렵다고 지적한다. 또한 살해된 군주가 인민들에게 추앙를 받고 있을 때만큼 위험한 경우도 없다고 덧붙였다. 그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 암살 음모는 결국 성공했다. 실패하기 쉬운 일반적인 조건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여러 명의 가담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키아벨리. /이미지=픽사베이
마키아벨리. /이미지=픽사베이

​배반과 음모, 속임수와 기만은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떼어놓기 어려운 기나긴 역사를 갖고 있지만, 공동의 이익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극히 위험하고 극히 두려운 악덕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한 나라의 완전한 몰락을 불러오기도 하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기도 한다. 온갖 첨단 금융기법이 발전할수록 속임수도 더욱 대담하게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대부분의 금융 범죄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지능화, 고도화되고 있으며 피해 규모도 천문학적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어떤 악덕들보다 이 부분에 대해 특별한 경각심을 갖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자그마한 미끼나 간단한 덫을 이용하여 손쉽게 큼지막한 먹잇감을 포획할 수 있었다. 쉽게 걸려드는 먹잇감이 존재하는 한 덫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온갖 협잡과 속임수가 판치는 금융시장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덫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금융 사기에 대한 예방책 가운데 하나는 무엇보다도 '탐욕'을 앞세우지 않는 일이다. "황소나 곰은 돈을 벌지만, 돼지는 도축될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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