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가상현실’에 열광하는가 [오인경의 그·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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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가상현실’에 열광하는가 [오인경의 그·말·이]
  • 오인경 후마니타스 이코노미스트
  • 승인 2023.06.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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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허구를 즐기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는 사람은 먼저 무엇이 '허구'인가에 대해서부터 문제를 풀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단지 우리 주위를 한번 휙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허구'가 도처에 범람하고 있음을 알고 화들짝 놀라게 된다. 오늘날 수억 명의 사람들을 TV 앞에 단단히 붙들어 놓고 있는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는 대부분 '허구'에 바탕을 둔 영상물들이다. 국공립 도서관의 서가에 빼곡히 꽂힌 책들 가운데 소설이나 희곡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다.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작품들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은 지어낸 이야기들이다. 누가 돈키호테와 햄릿을 실존 인물로 여길 것이며, 누가 로미오와 줄리엣이 허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영화 '아바타: 물의 길'의 한 장면 /사진=네이버 영화 홈페이지
영화 '아바타: 물의 길'의 한 장면 /사진=네이버 영화 홈페이지

​수많은 사람이 밥 먹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며 몰두하는 게임물 역시 마찬가지다. 극도의 몰입감을 주는 게임일수록 허구와 상상이 넘쳐나는 게임일 가능성이 크다. 허구가 판치는 분야는 드라마, 연극, 영화, 게임 등의 문화 콘텐츠 분야에만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다. 불과 1~2년 전만 하더라도 세상을 온통 뒤집어놓을 기세로 관심을 끌었던 '메타버스' 역시 가상·증강 현실에 기반을 둔 허구적 공간 개념이다. 흔히 소셜미디어로 불리는 SNS에서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조차 허구로 창작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베네치아에서 특히 유행했다는 '가면' 또한 실제 모습을 가리는 대표적인 사물이다. 왜 사람들은 이토록 허구에 몰두하는가?​

메타버스 /사진=이미지투데이
메타버스 /사진=이미지투데이

하버드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심리학을 가르쳐온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책에서 재미있는 얘기를 소개한다. 《스타트렉》에 출연했던 레너드 니모이는 《나는 스폭이 아니다 I Am Not Spock》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썼다가 결국 해명을 포기하고 《나는 스폭이다 I Am Spock》라는 회고록을 다시 썼다는 일화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은 배역일 뿐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주장을 했는데도 배우를 사랑한 팬들은 실제 인물이 주는 이질감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허구적인 인물을 더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스티븐 핑커의 주장에 따르면, TV 방송국에는 악역을 맡은 배우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시청자들의 우편물이나 편지들이 쏟아져 들어온다고 한다. 과연 지금도 그런 현상이 자주 발생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일화들은 왜 생겨날까? 현대인이 어릴 때부터 TV 드라마나 만화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럴까? 현대인은 옛날 사람보다 공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능력이 떨어진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허구에 몰입했을 때 느끼는 즐거움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가 너무 많이 생겨난 탓일까?

스폭 /사진=나무위키
스폭 /사진=나무위키

​인류는 사실 오래 전부터 연극을 즐겨 공연하고 관람했다. 고대 그리스 비극이 대표적이다. 그리스 최초의 연극 공연 기록은 기원전 53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까지 온전하게 전해지는 고대 그리스 비극은 불과 33편에 불과한데, 3대 비극 시인이 쓴 작품만 하더라도 무려 305편에 달한다. 그들은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디오니소스 축제 때마다 3부작으로 구성된 비극 작품 경연을 벌였다. 『오이디푸스 왕』으로 유명한 소포클레스가 모두 123편을 썼으며 그 가운데 18번 우승했고, 아이스퀼로스가 90편을 써서 그 가운데 13번 우승했다고 한다. 대규모의 합창단 구성과 무대장치 등 연극 제작 비용은 부유한 시민들이 나서서 후원했는데 이들을 코레고이(chorēgoí)로 불렀다.​

고대의 원형극장 /사진=이미지투데이
고대의 원형극장 /사진=이미지투데이

연극에서의 성공 요소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잘 짜인 대본, 의상, 분장, 무대장치, 음향효과, 배우들의 연기력 등.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에 크게 유행했던 고대의 운명적 비극은 훗날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등장한 셰익스피어가 성격적 비극을 창조하면서 다시 한번 찬란한 꽃을 피운다. 400년쯤 전에 런던에서 올려진 연극 작품 《햄릿》과 《오셀로》는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공연되고 있다.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미래에도 여전히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공연될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연극을 소비하는 방식만큼은 지금과는 크게 다를 듯하다. 500년쯤 훗날의 극장 풍경은 어떨까. 너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 『멋진 신세계』를 쓴 천재 작가 올더스 헉슬리가 미리 자세히 보여준 바 있기 때문이다. 1932년에 발표된 그 소설은 미래의 과학 문명이 인간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바꿔놓을지를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올더스 헉슬리 /사진=나무위키
올더스 헉슬리 /사진=나무위키

포드 기원 632년으로 설정된 '멋진 신세계'의 시대 배경은 대략 2540년쯤이다.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세계에서 가장 큰 특징은 첨단 생명공학의 발달이다. 모든 인간은 시험관에서 수정되고 조건에 맞게 배양되어 조건반사 양육을 받으며 자라난다. 인간들이 인공부화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는 사실로부터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화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번거로운 자녀 양육 의무가 뒤따르는 결혼 제도도 사라진다. 격정을 유발하기 마련인 '연인 관계'라는 것도 없다. 자유연애가 보편적인 사랑의 형태이고, 파트너를 오래 독점하는 연인 관계는 사회적 지탄을 받거나 금기로 여겨진다. 도무지 등장인물들 사이의 대화조차도 없을 듯한 숨 막히는 공간에서도 사건들은 일어나고 갈등이 생겨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소마(soma)라는 간단한 알약을 먹으면 그만이다. 청춘 남녀가 데이트를 즐기는 공간은 이른바 '촉감 영화관'이다. 가상현실이 진짜 현실처럼 느껴지는 공간이다.

21세기 기술문명을 이끄는 기업인 애플이 2014년의 애플워치 이후 무려 9년 만에 새로운 폼팩터를 발표했다고 해서 큰 화제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아우르는 혼합현실 기기 '비전 프로'에 대한 반응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많은 사람의 기대와는 달리 아직 안경 형태가 아닌 스키 고글 형태인 점이 무엇보다 아쉽다는 평가가 많다. 장시간 사용 시 무게감의 압박, 2시간의 짧은 배터리 수명, 비교적 고가인 점(3499달러) 등이 지적되고 있지만, 눈여겨볼 대목들도 적지 않다. 사용자의 눈, 손, 음성을 사용하여 기기를 제어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 12개의 카메라와 5개의 센서, 4K OLED 디스플레이 등은 애플의 기술력과 혁신성을 보여준다. 애플의 최고경영자는 비전 프로를 '착용형 공간 컴퓨터'로 정의했다.​

비전 프로 /사진=애플 홈페이지
비전 프로 /사진=애플 홈페이지
팀 쿡 /사진=애플 홈페이지
팀 쿡 /사진=애플 홈페이지

AR·VR·MR·XR 기술은 일찌감치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예견했던 것처럼 미래 기술문명을 대표하는 기술로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가상과 허구를 보다 실감 나게 느끼고 싶은 인간의 욕구는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거부하기 힘든 원초적 본능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스티븐 핑커는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책에서 "왜 사람들은 허구를 즐기는가?"라는 질문의 답이 명약관화하다고 결론짓는다. 그 물음은 "왜 사람들은 삶을 즐기는가?"라는 질문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삶을 즐기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허구를 즐길 줄 아는 데 있다는 얘기다. 즐거움 테크놀로지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기술이 '가상을 현실처럼' 느끼게 해주는 데 있는 셈이다. 오늘날 TV 화면이 자꾸만 커져 어느새 75인치 혹은 85인치가 예사롭게 소비되는 데에도 다 그만한 까닭이 있는 셈이다.​

스티븐 핑커 /출처=스티븐핑커닷컴
스티븐 핑커 /출처=스티븐핑커닷컴

"책이나 영화에 빠졌을 때 우리는 숨이 멎을 듯한 경치를 관람하고, 중요한 사람들과 허물없이 사귀고, 매혹적인 남녀들과 사랑에 빠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 주고, 불가능한 목표를 성취하고, 사악한 적을 물리친다."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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