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룩업’, 할리우드와 넷플릭스 [영화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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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룩업’, 할리우드와 넷플릭스 [영화와 경제]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1.03 0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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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돈룩업’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영화 ‘돈룩업’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지난 세기를 언뜻 보면 전쟁과 매스미디어가 떠오른다. 수천 년간 종이 위에 기록한 책과 그림만이 정보를 집적하고 전달하는 거의 유일한 매체였다. 20세기 초반에 전신이 모스 부호를 발신한 이래 영화,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퍼스널컴퓨터, 셀룰러폰,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매체의 발달은 인간 문명을 어느 한 개인의 몸에 체화하는 단계까지 가 있다.

하지만 80년대 후반까지도 동네 골목 어귀에는 출판사에서 빼돌린 책을 트럭 옆에 쌓아놓고 파는 사람이 있었다. 덕분에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 G.G.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지금까지도 책꽂이에 꽂혀 있다.

코스모스가 우주를 뜻하는 이유는 질서정연함에 있을 것이다. 우주의 질서 혹은 균형은 <돈룩업>(Don’t Look Up)에 나오는 혜성처럼 늘 도전과 복원의 과정으로서 실재하는 것이다. 최근까지도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의 균형이 달성되는 과정적 실재로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 자전에 의해 하이퍼리얼(hyperreal)이 도래하면, 상품의 생산과 유통, 소비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내파(implosion)를 입고 기호의 소비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고유의 합리성을 잃고 붕괴될 것이라는 전망을 한다.

대중매체와 자본, 자본의 하녀로 전락한 정치 권력이 주도하는 시뮬라크르 자전에 의해 폭발적으로 퍼져나가 재현되는 하이퍼 리얼리티는, 진실에 눈감게 하는 저지 기계(deterrence machine), 하이퍼리얼이 분출하는 성적 매력 혹은 경제적 성공에 억압당하는 소외(alienation), 그리고 상품 소비에 남아있는 마지막 합리성을 빼앗고 기호의 소비로 대체하는 내파 등의 양상으로 표출된다.

<돈룩업>에는 이 세 가지 양상이 고스란히 나타나는데, 배우들은 텔레비전과 인터넷 매체가 증폭시키고 재생하는 하이퍼리얼에 의해 소외되는 과정을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진실이 혜성처럼 어느 날 밤하늘에 나타나 모두가 올려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저지 기계의 보여주기식 통제는 위험의 실재가 소비사회 시스템의 내파에 의해 표면화되기 전에는 위험을 인식하기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얼마나 위대한가? <돈룩업>은 핵무기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처럼 핵 가방을 둘러싼 독단성 때문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것이다.

‘할리우드는 마르지 않는 샘일까’, 아니면 ‘넷플릭스가 할리우드를 집어 삼킬까’. 문득 궁금해진다. 발터 벤야민은 원본의 아우라가 사라진 기술 복제 시대에도 영화 보기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놓지 않았지만, 보드리야르는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시뮬라크르 자전의 전체주의적 속성 때문에 소비 시대의 탐닉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어두운 예측을 철회하지 않았다.

작가주의 영화는 자기 복제의 관성에 빠지지 않는 한, 감독 혹은 촬영감독의 선명한 낙관을 남기지만, 넷플릭스에 와서는 하위 장르로 분류되어 그 카테고리 안에서, 달리 말하면 기의가 아닌 기표 중심으로 소비되기 때문에 작가의 낙관을 소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화관에서 영화 보기는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몇 달간 우리 눈을 사로잡은 영화는 대부분 넷플릭스에 있었다.

가뜩이나 전체주의적 문화기반 아래 놓여있는 우리로서는, 코로나 팬데믹의 공포와 넷플릭스의 매력이 결합한 하이퍼리얼이 가져오는 억압과 소외에 대해서 늘 주시해야 하는데, 넷플릭스는 이미 그 답을 ‘지옥’으로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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