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코리쉬 피자’와 화폐전쟁 [영화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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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코리쉬 피자’와 화폐전쟁 [영화와 경제]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3.2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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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코리쉬 피자’의 한 장면. /사진=유니버설픽쳐스코리아
영화 ‘리코리쉬 피자’의 한 장면. /사진=유니버설픽쳐스코리아

카세트테이프 레코더에 테이프를 넣고 끝없이 재생해서 듣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Woman in Love>. 조훈현이나 서봉수의 기보와 함께 실리던 빌보드 차트도 궁금했지만,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이 노래에 집중했었다.

<리코리쉬 피자>는 철들지 못한 아재들을 만나며, 이미 세상 물정 다 아는 어린 남자에게 도돌이표처럼 회귀하는 20대 여자의 이야기다. 희망 사항에 불과하던 이 영화는 70년대 중반 오일쇼크를 맞아 주유소 앞에 길게 늘어선 차량이 보이면서, 현실에 발을 들여놓는다.

알라나와 어린 남자친구 일당은 언덕 위에 있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남자친구 집에 물침대를 내려놓고 오는 길에, 길가에 세워져 있던 터무니없이 마초적인 그의 차량을 부숴버린다. 통쾌함도 잠시 기름이 떨어져 트럭이 멈추자 후진으로 브레이크 없이 내리막길을 내려오게 된다.

산 중턱에서 주유소 근처까지 사이드미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후진으로 트럭을 몰 때의 알라나는, 오자서(伍子胥)가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리도록 소관(昭關)의 갈대밭에 숨어 있던 그날 밤처럼, 박지원이 랴오허(遼河)의 거친 물살 속을 일야구도(日夜九渡)하던(하룻밤에 아홉 번 건너던) 그날 밤처럼 실존의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세계는 갑자기 낯설어지고 이방인처럼 튕겨 나간다. 베이지 않기 위해서는 우물의 바닥까지 꿰뚫어 보는 자아의 주체적 운용이든, 접신하듯 타자와의 경계를 허물어트리는 물아일체든 무엇이든 필요하다.

그녀가 숨 막히는 운전을 무사히 마치고 세계로 환원됐을 때, OPEC가 위력을 과시한 오일쇼크는, 인플레이션이 통화당국의 통화준칙이 흔들리는 경우 외에 자원 카르텔에 의해서도 촉발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자원 민족주의는 블록경제에서 좀 더 효과적이었는데, 냉전이 해체되자 투기자본은 세계화의 물결 위에서 공간적 지배력을 전 지구적으로 확장하고 마침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그 힘을 명시적으로 발휘한다.

러시아 가스 송유관이 미국의 달러 결제 시스템 앞에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JP모건이 러시아의 디폴트를 연장해주던 날, 거의 동시에 중국의 대만침공설이 포털 뉴스에 걸린다.

이념과 자원을 두고 벌어졌던 지난 세기의 패권경쟁이 더 이상 의미 있는 분석이 아님이 드러나자 모두 화폐전쟁에 뛰어들었다. 중국과 러시아가 유로화 같은 단일통화를 구축한다고 나섰고 이 프로젝트가 실행된다면, 지정학적으로 밀접한 인도나 이란 등도 이를 외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화폐전쟁에 비하면, 알라나가 한줄기 구원의 빛으로 여겼던 정치와 마찬가지로 70년대 초반의 베트남 전쟁은 전투를 치르는 병사와 포화 속의 시민들을 제외한 이들에겐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이었나.

남자들은 똑같은 군복을 입고 여름밤에는 해변 대신 정글 속에서 도마뱀에 놀라거나 모기에 속수무책으로 물려야 한다. 여자들은 성적인 매력이 고갈된 늙은 남자나 풋내기들과 어울려야 한다.

인류는 여전히 반인도적인 전면전을 계속 벌이고 있지만 화폐전쟁이 첨예해져 달러·유로·위안 등이 균형을 맞추게 되면, 상호공멸의 핵 억지력처럼 전쟁을 멈추게 하는 차단기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돌이켜 보면, JP모건이 SWIFT(국제은행간통신협회) 밖에서 러시아를 지원한 것은 중국과 러시아의 단일통화 논의를 미리 감지하고 이를 저지하려는 의도였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음모론의 종결자 투기자본의 미심쩍은 움직임이 아니더라도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말처럼 인류가 이미 3차 세계대전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라면, 핵이 아닌 화폐전쟁에 의해 기축통화의 지위를 3등분하고 이들이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전쟁이 억지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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