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게임’과 호모 사케르 [영화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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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게임’과 호모 사케르 [영화와 경제]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1.10.1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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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능력 ‘0’의 호모 사케르(법적인 권리를 박탈당한 벌거벗은 생명)를 모집해 생존게임에 던져놓는 영화에서는 설득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현실은 더 냉혹하기 때문이다.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1.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멈춤과 전진)

호모 사케르는 대륙 내부의 황폐화 혹은 단절과 관련되어 있다. 해양세력이 패권을 차지하자 집시들은 대륙 안쪽으로 깊숙이 숨어들어 세계와 분리된다. 마치 서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선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정글로 도망가듯이, 조선의 젊은이들이 징용을 피해서 북간도로 넘어가듯이. 당초 이들 이방인, 낯선 자 혹은 손님들에게 품고 있던 양가적 감정 가운데 두려움이 사라지자 이들에 대한 탄압은 홀로코스트의 성격마저 띠게 된다. 대부분 총소리에 놀라 입구 쪽으로 달려가지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도 바다가 가로놓여 있어도, 뒤돌아보지 않고 대륙의 반대편 끝까지 바다 건너 또 다른 해안선까지. 호모 사케르에겐 멈춤과 전진만이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2. 달고나 뽑기(위험분산과 의사결정)

게임의 중단 여부를 투표에 부쳤을 때, 게임의 오너는 스스로 투표에 졌음을 인정한다. 인간의 의지는 가위에 눌렸을 때 소리를 내지르는 것처럼, 중단을 외칠 때 발화된다. 달고나 뽑기는 다시 신의 영역으로 들어섰음을 의미하고 이에 대응하는 인간의지의 이면에는 늘 자연의 질서가 ‘운칠기삼’으로 웅크리고 있다. 운칠기삼이라는 자연법칙을 깨닫는 순간, 인간의 모든 지혜는 위험분산과 의사결정이라는 과제에 집중한다.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3. 줄다리기(경험과 대리인)

효율적 시장 가설(EMH, Efficient Market Hypothesis)에서 강형시장은 내부정보로도 초과이익을 얻을 수 없는데, 현재 우리의 자본시장은 공시된 정보로는 초과이익을 얻을 수 없는 준강형시장과 강형시장의 어디 쯤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강형시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경험과 대리인이다. 경험과 대리인만이 내부정보를 가진 자 혹은 작전세력과의 정보비대칭 승부에서, 개미라는 호모 사케르가 승리할 가능성을 높인다.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4. 구슬치기(제로섬)

돈 놓고 돈 먹는 전 지구적 투기자본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자본시장에서 숨길 수 없는 양태는 제로섬이다. 제로섬 게임에서는 참가자 일방이 다 털려야 끝나게 되는데,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의 자기교정 능력은 항상 새로운 참가자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끝나는 법이 없다. 축적된 모순은 결국 공황이나 전쟁을 통해서 해소하지만, 인간의지로 제로섬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있다. 희생과 배려라는 일시적이고 특이한 덕목의 발현이다.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5. 징검다리(러시안 룰렛)

복불복(福不福)에 목숨을 걸게 되면 비로소 온전히 신의 가호를 빌게 된다. 주체로서의 인간은 이미지만 남게 되지만, 인간에게는 여전히 두 개의 선택지가 남아있다. 인과응보와 자살이다. 인과론적 인식과 자살은 인간이 신에게 저항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다. 자신의 지나온 삶의 궤도 안에서 죽음을 수긍하는 것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능력은 오직 인간만이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6. 오징어놀이(폭력)

여전히 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는 인간에게 신이 내린 최후의 형벌은 폭력성이다. 오징어 놀이는 남자 아이들의 전유물이었다. 중학교 다닐 때까지 점심시간이면, 운동장에 오징어를 그려놓고 교복이 찢어지든 안경이 부러지든 우리는 온 몸을 부딪혀가며 오징어 머리에 있는 작은 원 안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 기를 썼다. 하지만, 자멸적 폭력의 한가운데에서도 피어나는 것이 가족애다. 가족애는 인간애의 발원지로서 자연의 질서 안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넷플릭스가 아닌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고 싶지만, 새로운 영화를 스크린에서 마주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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