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싱 타는 여자들’, 물가의 버드나무처럼 [영화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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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싱 타는 여자들’, 물가의 버드나무처럼 [영화와 경제]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2.03 0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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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싱 타는 여자들’의 한 장면. /사진=플라잉타이거픽처스
영화 ‘미싱 타는 여자들’의 한 장면. /사진=플라잉타이거픽처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 타이틀이 올라가면 늘 비상구 불빛을 찾아 계단을 내려갔는데, <미싱 타는 여자들>엔 비상구가 없다. 도저히 그대로 일어설 수 없는 울먹임과 오래된 흑백사진이 뿜어대는 아우라가 텅 빈 영화관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80년대 후반까지도 이 땅에 어린 여성들은 적어도 가족 공동체 내에서 호모 사케르였다. 그들의 미래는 오빠나 남동생에게 저당 잡혀 있었다. 물론 남자 아이들에겐 가장이라는 멍에가 예정되어 있었고.

일방적인 희생이나 양보가 광범위하게 용인된 것은 전쟁 직후라는 극한 상황을 버텨내야 하는 암묵의 약속 때문이었고, 여기에 더해진 것은 산업화로 인한 농촌 공동체의 붕괴와 도시 빈민의 척박한 삶이었다.

잔인한 시절은 군사정권의 개발독재 시스템이 자행하는 노동자에 대한 가혹한 착취를 재벌의 자본축적을 위한 양분으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보았다. 야학에 다니던 누나들의 피곤한 눈빛에 맺혀있는 형형한 자의식을.

어느 늦은 봄날 학원에서 이은하의 ‘봄비’를 부르던 그녀의 청명한 노랫소리와 “회교혁명 이전의 이란이 미국에게 어떤 군사적 가치를 지녔는지”를 설명해 주던 ‘자유실천문인협회’ 출신 퇴직교사 선생님의 의기 어린 목소리는 모두 새로운 세계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그 높다란 차별의 벽을 조금씩 조금씩 부숴버렸다.

영화 ‘미싱 타는 여자들’의 한 장면. /사진=플라잉타이거픽처스
영화 ‘미싱 타는 여자들’의 한 장면. /사진=플라잉타이거픽처스

<미싱 타는 여자들>은 승리의 노래이다. 그들은 물가에 심어놓은 버드나무처럼 삶의 터전에 깊게 뿌리내렸지만, 모순은 사라지지 않기에 이 영화가 단순히 ‘저지기계’(deterrence machine)로 작동하지 않게 주의한다.

청계천 피복노조 여공들이 신호탄을 쏘아 올린 노동과 자본의 지난한 싸움은 이제 다른 형국을 맞이하고 있다. 20세기 내내 한계효용과 한계비용 사이에 격렬한 투쟁이 벌어졌지만, 노동에 대한 자본집약도가 특이점을 통과한 20세기 후반 어느 날, 자본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났다.

21세기에 진입해서는 매스미디어가 특정 개인과도 직접 연결해 데이터를 주고받는 시뮬라크르 자전과 시니피앙 연쇄가 폭발하는 빅데이터의 시대가 열렸다. 자본은 이를 놓치지 않고 소비자의 선호를 조작해서 수요를 창출하거나 억제하기도 한다.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아닌 자본과 소비의 갈등이 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자에 대한 소외가 아니라 소비자에 대한 소외가 사회 심리적으로 좀 더 리얼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미싱 타는 여자들’의 한 장면. /사진=플라잉타이거픽처스
영화 ‘미싱 타는 여자들’의 한 장면. /사진=플라잉타이거픽처스

전선이 불투명해지자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조차 도전해볼 만한 금기 정도로 ‘라떼’ 취급을 받지만, 트럼프가 촉발한 공정논쟁은 인류애가 멜랑꼴리가 아니라 공멸을 막기 위한 방어선임을 깨닫는 순간 쉽게 독파된다.

‘(n-1)’의 사회구성원이 1을 희생양으로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하며 느끼는 카타르시스에 중독된 사회는 위험사회로의 진입에 둔감하고 결국 내파를 입고 먼저 무너지기 때문이다.

<미싱 타는 여자들>이 옛 청계천상가 건물 옥상에 올라가 손잡고 노래 부를 때, 우리는 무엇을 소환해야 하는지. 영화관을 빠져나오자 좌석버스 한 대가 고래 소리를 내며 우회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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