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녀 “취하면 제각기 흩어지겠지” [영화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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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녀 “취하면 제각기 흩어지겠지” [영화와 경제]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1.12.20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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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협녀’(1971년, 호금전)의 한 장면. /사진=티빙
영화 ‘협녀’(1971년, 호금전)의 한 장면. /사진=티빙

제국의 말기에는 이런저런 현상들이 공통으로 벌어지는데, <협녀>(1971년, 호금전)는 용감하게도 명조 말기를 그린다. 쇠락한 제국 쪽에 서 있던 사람들은 관료 등 지배적인 권력 시스템 안으로 진입하기 어려워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비밀조직을 결사하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현재까지도 범죄조직으로 남아있다.

15세기 중반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로마제국이 유명무실해지자 그 힘의 공백기에 출현한 이탈리아 마피아, 명·청 교체기 반청운동을 주도한 비밀결사에서 뿌리를 찾는 중국의 삼합회,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해 봉토를 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계열의 낭인 무사들이 조직화한 일본의 야쿠자, 최근에는 소련이 무너지자 KGB 등이 주축이 돼 발호한 러시아 마피아 등이 그렇다.

정복 전쟁에서 패하든 당쟁에서 실각하든 봉건시대에는 인신의 자유를 뺏기고 토지와 재물을 약탈당하고 벼슬길이 막히지만, 근대 이후에는 시장을 뺏긴다. 생산수단 혹은 기업을, 그리고 마침내 경제정책의 주권(재정, 금융 감독, 신용, 화폐 발행 등)을 상실한다.

현대에서 전쟁에 패한다는 것은 기업활동의 패퇴를 의미한다. 소비자 효용의 극대화나 인터내셔널리즘이 점점 아카데믹한 가정에서나 논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국의 말기에는 또한 ‘협녀’가 나타난다. 사회적으로 거세된 남성성이 하수구로 흘러 들어가 겨우 지하세계를 장악하는 반면, 협녀는 남자를 대신해 사회의 일정 영역을 차지한다.

<협녀>의 양혜정은 늘 단호하고 능동적이다. 피하지 않는다. 단순히 무술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고성제의 어머니가 가문의 대가 끊어질 것을 염려하며 한탄하자 그날 밤 바로 고성제를 폐가로 불러들여 노래를 부른다. “(달과 그림자가) 깨어있을 땐 함께 즐기지만 취하면 제각기 흩어지겠지”라며.

항우가 사면초가에 빠져 우미인과 헤어질 때, <색계>의 양조위가 기방에서 탕웨이의 노래를 들을 때, 그 격렬한 매력은 충동적이지만 사실 각 문화의 모든 층위가 녹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절 밑에 고성제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내려놓고 고씨 가문의 대를 이으라며 맡겨버린다. 산으로 들어갔지만 혜원대사가 환속을 권하자 주저함 없이 칼을 차고 산을 내려간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배용균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지만,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라는 전형적인 화두이기도 하다. 부처가 되려는 야심이든 혹은 세속의 풍진에서 벗어나고픈 본능이든, 깨달음은 연민과 욕망의 상충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하는 항상성의 기원을 주체적으로 찾는 것이다. 양혜정이 속세의 고성제와 아이를 보듬어 주기 위해 산을 내려간 것이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연기법에 어긋나지 않다는 것이다.

호금전의 무협 영화들은 역사·정치적 배경 안에서 시동을 건다. 유교적 관료제 아래에서 정치는 자원배분 문제를 다루는 경제적 의사결정 기구이자 윤리적 문제에 관한 담론을 형성하는 의식화 기제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겠지만, 영화 속 주요 인물들은 나름 다른 길을 선택한다.

양혜정의 언행은 무협 영화에서 등장하는 이상적인 ‘따거’(큰 형님)의 모습 그대로이다. 심지어는 불가에 귀의해 선승으로서 혜원의 법맥을 계승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성적으로 대상화된 객체가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는 단계는 어색하지 않게 극에 녹아있지만, 희미하게 위화감이 남아있다. 그녀가 주체로서 혜원대사라는 큰 타자를 횡단하기 직전의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불쾌한 골짜기)를 거치는 불편함이다.

하지만 어떠한가, 가끔 달무리가 지도록 달빛이 짙어지면 손을 들어 그 빛을 담아보려고 애쓴다. 마음속에 깃든 다른 세계가, 미련 때문에 숨 막히지 않게 빛과 호흡이 전해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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