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메어 앨리’, 여성 노동계급의 출현과 팜므파탈의 소멸 [영화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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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메어 앨리’, 여성 노동계급의 출현과 팜므파탈의 소멸 [영화와 경제]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2.28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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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메어 앨리’의 한 장면. /사진=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나이트메어 앨리’의 한 장면. /사진=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대공황의 여파로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모두가 예측하고 있던 시절, 가난과 좌절에서 벗어날 길이 없던 이들에게 알코올 중독의 불가항력적 기전은 충분한 변명거리였다.

이윽고 수많은 젊은이가 일터에서 전쟁터로 끌려가게 되자 징집되지 않고 미국 안에 남아있던 남자들은 신경쇠약증에 노출되고, 술은 또다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 무력감은 마치 섬에서 뭍으로 나간 사람들이 겪게 되는 낯섦과 생경함 같다.

남자들이 사라진 작업장에는 1차 세계대전에 이어 다시 한번 여성들로 채워지고 군수공장의 무기 생산라인은 멈추지 않았다.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그 몇 년간 여성들은 동등하게 대우받고 있다고 착각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대부분 전쟁 전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그 때문인지 전쟁 기간 여자들은 지나, 릴리스처럼 무언가 발진한 모습, 팜므파탈로 그려지게 된다.

릴리스가 위스키 한 모금을 머금고 스탠턴과 키스하자 스탠턴은 술잔에 남아있던 위스키를 입속에 훌훌 털어버린다. 애욕과 맞물린 갈증이 해소되자 그는 걷잡을 수 없이 술에 매달리게 된다.

코로나 시대에도 술 소비량이 줄어들지 않듯이, 대공황과 전쟁은 경제적으로 무능한 가장이나 전쟁에 참가하지 못한 채 잿빛 시선 속에 풀죽은 남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기본적인 도피처였다. 스탠턴의 의붓아버지, 닭의 목을 물어뜯던 기인, 독심술 교본을 넘겨주지 않으려던 피트는 결국 스탠턴의 미래였지만 그는 그들 모두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에 반해 격변기를 유영하며 살아남고 오히려 승승장구한 사람 중에도 희망이나 욕망을 죄책감과 양립시키는데 서툴렀던, 판사나 에즈라 같은 부류는 수많은 죽음에 노출됐음에도 권력과 돈이면 죽음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오만과 자기기만에 빠져 있었다.

미국은 1·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월남전을 겪으면서 물량전이 모든 전략의 기초가 된다는 교훈을 확립한다. 전장이 미국 밖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전략적 전망이었고 덕분에 군수산업과 금융산업은 미국을 진정한 패권국의 지위에 올려놓지만 마음의 상흔은 묘하게 어그러져 있다.

판사나 에즈라는 아이를 다시 낳거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대신 삶의 의욕을 잃고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을 기망하는 쪽을 선택한다.

스탠턴은 능수능란하게 시대의 환란을 헤쳐나가고 욕망의 과실은 감나무처럼 주렁주렁 열려 릴리스의 금고 속에 채워졌지만, 그는 릴리스의 사랑한다는 말에 비로소 배신당했음을 깨닫고 순식간에 몰락한다.

릴리스가 에즈라가 해쳤다는 젊은 여자 가운데 한 명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릴리스는 스탠턴이 에즈라 같이 난세에 치부하고 사랑한다는 말에 배어있는 자기기만의 뉘앙스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자라는 것을 확인하자 즉각 응징한다. 사랑에 능숙한 남자가 헤어질 때는 계산 따위를 하지 않는다.

전쟁의 필요에 따라 잠깐씩 주어졌던 여성들의 권리는 전쟁이 끝나면 먼지처럼 사라지곤 했는데, 20세기 후반 정보혁명이 본격화되고 여성들이 고용시장의 한 축을 차지하게 되자 팜므파탈이란 용어도 홀연히 사라졌다.

바이든이 바그람 공군기지를 탈레반에게 넘겨준 채 아프가니스탄에서 퇴각하고 메르켈이 물러나자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다. 하지만 나토(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북대서양조약기구)든 미군이든 러시아군과 직접 교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방세계(혹은 미국과 그 동맹들)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 적대국은 중국이기 때문이다. 장차 중국과 대결하기 위해서는 서유럽을 온전히 유지하고 오히려 러시아를 나토에 우호적인 세력으로 끌어들여야 하는데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이 도착의 한가운데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스스로 빠져나와야 한다. 물론 전쟁물자는 무한대로 공급될 것이다. 미국 중간선거까지 끝나지 않고 잔인한 소모전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살상을 줄이는 것이 최우선이다.

동학농민군의 고뇌가 떠올려지고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미얀마의 시민군이 교차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지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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