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러시’, 비운의 주인공들 [조수연의 그래픽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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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러시’, 비운의 주인공들 [조수연의 그래픽저널]
  • 조수연 편집위원(공정한금융투자연구소장)
  • 승인 2020.06.02 0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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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회에 세계 금 산업의 현황과 금 가격 전망에 대해서 정리해봤다. 우리 주변을 가득 서성이고 있는 블랙스완이 걱정스러운 마음은 모두가 같을 것이다. 위기가 닥칠 때 인류는 항상 황금을 생각한다. 그 이유는 황금의 여러 가지 속성 중 불변성 때문일 것이다.

불변성은 곧 영원성(eternity)이며 신의 영역이다. 사치로 오해하는 분이 있을 텐데 많은 문명에서 신을 황금으로 장식하고 표현하는 이유가 이 영속성이다. 눈으로 보는 신. 이러한 인류의 황금에 관한 신뢰가 소유욕구를 만나는 것은 필연이다.

또한 우리가 아는 한 감가상각 걱정이 없는 유일한 물건이 황금이다. 황금은 유일하게 영원한 가치 저장 수단이고 가치의 소실점이 없다. 이러한 불변의 특성은 요즘처럼 정치, 경제, 가치관 모든 것이 무너지는 시기에 더욱 동경의 대척점에서 두드러진다. 지금 지구상의 금의 총량 19만6000톤은 136억 년 전 우주 빅뱅과 같이 생성되었다고 한다. 교환가치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이유로도 인류는 황금을 추종할 수밖에 없었다.

/일러스트=조수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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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황금의 역사에 대해 정리된 자료는 많지 않다. 마침 관련 자료를 조사하던 중 루안샤오총이 쓴 ‘39가지 사건으로 보는 금의 역사’라는 책을 발견했다. 대부분 경제사 서적에서 산발적으로 기록되던 황금의 역사가 황금의 입장에서 정리한 자료다.

한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쑹훙빙의 ‘화폐전쟁’처럼 경제사를 보는 이 책 저자의 태도는 금융자본에 비판적이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황금이 인류 역사와 경제, 금융과 맺은 관계를 상당히 방대한 자료로 정리하고 있는데, 먼저 필자에게 눈에 띄는 것은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골드러시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본인은 불행했던 인물의 스토리다.

/일러스트=조수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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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의 나라, ‘지팡구’를 찾아서

인류 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골드러시는 스페인, 미국, 호주, 남아프리카, 알래스카 대략 5가지 정도로 추려 볼 수 있다. 이들 중에서 첫번째 황금과 관련된 비운의 인물은 스페인 골드러시와 관련이 있다. 너무나 유명한 바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다.

혁신적인 사고로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유명한 에피소드를 남긴 인물인데, 콜럼버스는 새로운 항로를 찾아 탐험을 떠나는 동기는 황금이라고 본인이 남긴 편지에 기록하고 있다. 아무도 가보지 않는 지구 끝을 넘겠다는, 가장 무모하게 황금을 좇은 인물의 추동력은 고귀한 이념보다는 일확천금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황금의 나라 지팡구가 그의 목적지였다. 지팡구(Cipangu)는 당시 알려진 일본의 명칭으로 현재 사용하는 일본 이름 재팬(japan)의 유래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태생인 콜럼버스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젊어서 프톨레마이오스 고대지도 등 방대한 연구를 거듭했고, 포루투갈과 스페인 왕실을 8년 이상 집요하게 설득하는 노력을 했다. 결국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의 허락으로 1492년 8월 3일 산타마리아호로 출항했고 지팡구와 이름이 유사한 남아메리카의 쿠바에 도착했다. 콜럼버스는 쿠바라는 이름을 듣고 지팡구와 비슷하므로 조금 더 가면 일본에 도착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6년간 3차례 항해를 시도했으나 콜럼버스는 황금 발견에 실패하고 만다. 콜럼버스는 결국 스페인 왕실에 약속한 황금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말년을 빈곤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자기가 간 곳이 인도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아메리카 원주민은 인디언으로 불리게 됐다.

/일러스트=조수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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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이곳을 신대륙으로 판단하고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작 이곳에서 황금을 발견한 인물들은 따로 있었다. 피의 정복자 코르테스와 피사로는 아즈텍, 잉카 문명을 멸망시키며 대량의 황금을 스페인에 공급했다. 이 덕에 골드러시가 발생한 스페인은 세계 최강국에 등극한다.

이 황금을 사치와 전쟁 비용으로 낭비한 스페인은 영국의 드레이크 선장이 칼레 해전에서 무적함대를 침몰시키며 쇠퇴의 길에 들어섰다. 20세기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세계 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황금의 꿈에 희생된 첫번째 비운의 인물이다.

/일러스트=조수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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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드러시에 ‘꿈의 터전’을 잃다

두번째는 미국의 골드러시 속 비운의 인물이다. 1834년 빚 독촉을 피해 미국으로 도망한 스위스인 존 셔터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강 부근에 정착하고 성실하게 노력해, 1846년까지 영지에 60개 건물이 들어설 정도로 성공했었다.

그러나 비운은 얘기치 않은 곳에서 셔터에게 찾아왔다. 1848년 아메리칸강 콜로마에 대형 제재소 설치를 추진하던 중 한 동료가 강물에서 사금을 발견한 것이다. 기쁜 마음에 이 동료는 한걸음에 달려와 존 셔터에 보고했으나, 그는 막대한 투자를 하는 제재소 건설에 부작용을 줄 것을 우려하며 감추려 했다.

그러나 황금은 존 셔터의 꿈을 허락하지 않았다. 인부들에 의해 강에서 금이 발견됐다는 소문이 나며 이 일대에 골드러시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 골드러시 참여자를 포티나이너스(forty-niners)라는 별명으로 부르는데 현재 샌프란시스코 프로 미식축구단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만큼 1949년 골드러시는 이 지역에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849~1853년 10만명의 포티나이너스가 몰려들었고, 조그만 어촌이었던 샌프란시스코는 인구 35만명의 도시로 순식간에 성장했다. 이 지역에서 2년 동안 4500만달러 가치의 금을 생산하며 골드러시는 미국 역사상 남북전쟁에 버금가는 큰 획을 그었다. 그러나 존 셔터는 골드러시 인파에 개척한 땅을 점령당했고 오히려 골드러시로 평생의 꿈의 터전을 잃고 말았다. 이후 존 셔터는 북미의 정반대 지역인 북동부 펜실베이니아로 이주하여 은거했다고 한다. 존 셔터의 허망한 스토리는 덴 포갤버그의 컨트리 송으로도 전해진다.

/일러스트=조수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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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돈 10파운드에 팔아치운 ‘광맥’

마지막 세번째 비운의 인물은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 골드러시의 조지 해리슨이다. 호주 출생으로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에 참가해 조금 재미를 봤으나 다시 금을 찾아 아프리카로 들어온 인물이다. 나름 황금에 집념을 불태우던 그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행운을 만나게 된다.

해리슨은 금을 찾는 여비 마련을 위해 인근 과부 농장일을 도와주던 중 노천에서 우연히 금 광맥을 발견한다. 하지만 남아프리카의 금 광맥은 제련에 상당한 자본이 필요했다.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시안화법이라는 금 제련 신기술을 발견하며 역사상 가장 큰 골드러시가 시작되었으나 해리슨은 사정이 달랐다.

그는 정부에서 발행하는 황금 발견자 소유증서를 받고도 자본이 없어 금 광맥은 그림의 떡이었다. 결국 해리슨은 제련 비용을 마련하지 못하고 소유증서를 단 10파운드에 매도했고 이후 그는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스페인, 미국, 남아프리카 골드러시는 인류 역사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 실마리를 제공한 인물들은 불행했다. 역사 속에 계약자, 피보험자, 수익자가 다른 경우가 다반사인 것은 우연일까, 기획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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