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된 문화의 위력 ‘파묘’ [영화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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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된 문화의 위력 ‘파묘’ [영화와 경제]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4.03.05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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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묘’의 한 장면. /사진=쇼박스
영화 ‘파묘’의 한 장면. /사진=쇼박스

<파묘>는 여러모로(배우의 마침맞은 카리스마, 조화로운 연출, 적절한 배경음악 등등) 무난한 영화이지만, 우리를 끝까지 사로잡지는 않는다. 눈앞에 현현한 귀신은 중국의 관우나 악비 같은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적인 심리의 굴곡을 들여다보는 졸깃함이 사라지고 역사의식의 파도 앞에 직면하게 된다.

일본에서 버블이 꺼진 후의 장기적인 경기침체기에 시오노 나나미 같은 작가는 일본의 남성성이 부족하다며 이탈리아로 날아가 <플루타크 영웅전>을 각색하며 <로마인 이야기>를 만들었고 일본 기업의 패퇴는 남성성 부족이라는 자책으로 이어지며, 오다 노부나가 혹은 미야모토 무사시 같이 무패의 사무라이나 군사를 지휘하는 방식에서 지루한 공성전이 아닌 전격적인 기습작전에 능숙했던 장군들을 관습적으로 반복하며 신격화했다.

<파묘>에서는 중국의 관우나 악비에 비교할 수 있는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나 미야모토 무사시 같은 귀신을 음양오행의 상생(수生목, 목生화, 화生토, 토生금, 금生수) 혹은 상극(수剋화, 화剋금, 금剋목, 목剋토, 토剋수) 관계에 기초해 간단히 내쫓는다. 을지문덕 장군이나 강감찬 장군의 도움도 없었고, 군국주의 시절을 흠모하는 시대착오적인 비밀결사의 방해도 없었다. 오직 역사에 휘감긴 개인들의 역사의식만으로 사특한 말뚝을 뽑아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버블이 꺼진 후에 부풀려진 일본식 마초에 대한 비아냥일 수도 있지만, 석탑의 결계나 산신 할머니의 힘에 의해서만 도깨비불(혹은 혼불)로 실체를 드러내는 이른바 사념(思念)에 물들지 않고 사념을 물리치는 방법일 것이다.

덧붙이자면, 일제가 심어놓은 쇠말뚝을 토지조사사업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도깨비불을 반딧불로만 설명하는 것과 다름없다. 아니, 토지조사사업이야말로 일제의 식량 수탈을 위한 사전 작업이었으니 일제의 침략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음양오행의 운행은 현실 세계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예측하는 데 유용한 것으로 한자문화권의 학인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경건하게 받아들여졌으므로, 음양오행에 의해 세계 경제를 파악하고 예측하는 것 또한 흥미로운 일이다. 먼저 21세기에 두드러지게 약진하여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라고 불리는 남반구와, 4계절이 순환함으로써 저절로 지혜로워졌다고 믿는 서방세계의 선진국 그룹과 동아시아의 현대화된 공업국가들이 자리 잡은 북반구로 나누어 살펴본다.

북반구 선진국들의 가장 큰 문제는 고령화와 인구감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제에 가장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대처한 것이 미국의 이민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이민정책과 함께 양대 축을 이루고 있기에, 인플레이션 팽창기에는 대규모 실업 사태로 이어지며 경기침체를 초래한다. 예외적인 시기가 있었는데 전쟁 직후였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는 이주 노동자들의 본국 귀환으로 그 뒤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관련국 노동자들의 참전으로 노동시장은 임금인상을 견뎌낼 만큼 경직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탄력성은 2차대전 이후의 황금시대나 월남전 때의 ‘장막시대’(철의 장막, 죽의 장막 등) 경제보다는 당연히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고금리와 고임금을 견뎌내지 못하고 대규모 구조조정이 진행될 것이다.

이에 비하면 북반구에 위치하지만, 남반구의 비동맹 국가들과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유지해 온 중국과, 중동 등 아랍 세계, 인도와 동남아시아, 브릭스의 한축을 이루는 브라질을 비롯한 중남미, 그리고 아프리카 등은 폭발하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하던 과거와는 사뭇 다르다.

우리가 엑스포 유치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완패한 것이 그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와이파이(Wireless Fidelity)가 공간을 가로질러 그들 사이의 정보교환과 의사소통을 증진하고 에어컨과 같은 냉방기가 그들에게 협상에서의 평정심을 갖게 한다. 와이파이와 에어컨은 북반구의 산업국가들에게 축복을 안겨주었던 전기통신과 철도, 항공기 등 교통의 혁신과 마찬가지로 남반구의 노동생산성에 거대한 축복이 될 가능성이 크다.

노동인구의 변화만 놓고도 남반구와 북반구는 상호의존 하며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음양오행의 운행 양태를 기술해 놓은 것이 주역(周易)인데 주역의 역(易)은 ‘바꾸다’와 ‘바뀌다’의 의미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결국 남반구의 운명은 기술적 조건과 주민들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파묘>의 미덕은 상위 2% 사람들이 누리는 부(富)가 강박의 대가라는 사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의사결정을 위한 대안 간에 차이를 읽어내는 능력이 사실상 동전을 던지는 것과 다름없고 문제가 되는 것은 동전을 던지기 전의 의식(儀式)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른바 형식(形式)이 의식(意識)을 결정하는 것이다.

감수성과 공감 능력을 ‘0’ 상태로 낮추고 스스로 접신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무당이나 사제 등에 의지하는 것은 집중하지 않는, 몰입하여 무아지경에서 수행하는 것을 잊어버린 자들의 퇴행이다. 수천 명의 환자를 임상하여 맥을 짚는 대신, 맥진기만 사용하는 자들의 편리 같은 것이다.

하지만, 육손이 유비의 매복을 감지하듯 현대의 CEO에게도 몰입하여 무아지경에 이른 자에게 주어지는 교신은 존재한다. 애니멀 스피릿은 데이터에 기반 한 보고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오직 성공과 실패의 책임을 전적으로 짊어지며 헤쳐 나간 자에게만 주어지는 능력이고, 그래서 “부자 3대 못 간다”라는 것이다. 그에 비해 GE의 후계자 양성 과정은 마치 우리나라의 양궁 국가대표 선발 과정과 흡사하다.

물론 실적주의의 굴레에 사로잡힌 전문경영인과 창업주인 일론 머스크를 비교할 때 미래에 대한 포트폴리오가 빈약해지는 문제가 있겠지만, 우리의 기업지배구조는 점점 더 무능한 창업주의 후손들과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고도 비전을 구현하는 전문경영인들의 복합체 같은 양상을 띠며 조선왕조실록을 재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역이나 조선왕조실록 같이 기록된 문화는 가장 강력한 상징 체계를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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