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에도 꽃이 핀다’, 손님 사라진 상가의 공포 [김경훈의 시네노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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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에도 꽃이 핀다’, 손님 사라진 상가의 공포 [김경훈의 시네노믹스]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4.02.07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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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에도 꽃이 핀다’의 한 장면. /사진=ENA
‘모래에도 꽃이 핀다’의 한 장면. /사진=ENA

어느 바닷가 군청 씨름단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들을 소재로 한 <모래에도 꽃이 핀다>는 잘 버무려져 있다. 이것은 회피일까, 달관일까? 아니면 각각의 삶이 짊어진 심연 속에 피어나는 어지러움이 어쩌면 상호 이해 불가의 영역 안에 영원히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실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일까?

어렸을 적 고향에 대한 희구가 치유를 바라는 본능적 회귀이겠지만, 그곳에서도 미지의 열락을 향한 욕망이 들끓고 있음 또한 자명하다. 따라서 법의 경계선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고 공동체가 유지되는 오래된 마을일수록 사적 규제 또한 강력하게 작동한다. 그중에서도 ‘천인소지(千人所指) 무병이사(無病而死)’가 시전하면 조직 깡패나 파락호가 아닌 한 대부분의 사람을 효과적으로 규율한다.

현대 도시의 익명성이 제공하는 자유로운 공기가 잠시 잊게 만든 공동체의 규범이 지니는 억압이 인터넷 공간의 전파를 타고 명징하게 부활했듯이 우리는 다른 영역, 예를 들면 전통적인 중개인이나 대리인이 사라지고 직거래하는 P to P 전자상거래, 물류시스템의 최적화 흐름을 찾아내고 효과적으로 개선하는 로지스틱스, 구매한 제품에 대한 신속한 피드백으로 재고비용을 최소화하는 제품 사이클의 극단적인 축소 등에서 그 산업적 위력을 목격하고 있다.

그 와중에 2024년 여름 이후 불어닥칠 상업용 부동산의 위기는 전산화된 업무환경에서 일터, 주거 생활공간, 휴가지의 구별을 흐릿하게 만드는 스마트워크 센터의 도입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성큼 앞당겨지거나 구매 행위 패턴이 오프라인의 점포가 아닌 온라인상의 비대면 구매로 바뀌는 추세적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그래서 되돌릴 수 없다는 전망이 점점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바우만의 ‘액체 현대’(Liquid Modernity)에 진입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미국이나 유럽과는 달리 여전히 경직된 사회인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목전에 다다르고 있음이, 지방 중소도시의 의류 쇼핑센터가 급격히 몰락하고 있다거나 수도권의 주상복합건물이나 지식산업센터에서 대규모 공실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확산하는 ‘상가 포비아’에서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액체 현대 속 소비의 성전이었던 백화점이나 거대 쇼핑몰이 전자상거래 등으로 젊은이들의 외면 속에 쇠락하고, 마치 자라투스트라가 동굴 밖으로 나오며 “태양아, 너는 네가 비추는 피조물(被照物)이 없다면 얼마나 덧없는 존재란 말이냐”라고 외쳤듯이, 과시욕이나 현시욕의 상대방이 사라진 소비의 성전은 ‘계몽’(enlightenment)의 대상이 사라진 20세기 초반과 같은 혼돈 속에서 마침내 붕괴할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보드리야르가 말한 소비사회가 시뮬라크르 자전이 가속화되는 쪽으로 진전되면서 본말이 전도되고,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 특유의 합리성을 상실하고 ‘내파’(implosion)를 입는다는 전망의 때늦은 실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결국은 벌어질 일이었다.

고금리의 스트레스는 주변에 손은 내밀며 버텨낼 수 있으나, 2022년 초부터 가시화된 거래량의 감소로 인한 상가 가격 하락의 공포는 건물주의 인내를 촛농처럼 녹아내리게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주택시장에 매몰되어 있을 때, 자산시장의 붕괴는 상업용 부동산의 임대수익 ‘0’과 양도차손이라는 실재 속에서 소리 없이 찾아와 기나긴 경기침체의 터널 안으로 구겨 넣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지대(Rent) 추구 행위에 기름을 부은 21세기 초반의 미국이나 일본의 저금리와 양적 완화정책, EU의 절름발이 통화정책 탓으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위기에 대한 강력한 복원 탄력성을 발휘하는 역사공동체 혹은 사회구성체라는 공동체 자산이 있다.

역설적으로 근대에 우리를 억압했던 성리학적 지배 질서(혹은 화엄적 세계관)가 정보혁명 시대에 자발적 참여라는 민주주의의 고갱이를 품은 채 되살아남으로써 물 탄 듯 흐려졌던 사회의 연대감은 또 다른 기회를 맞이하는 것이다.

<모래에도 꽃이 핀다>는 인터넷이 세계인에게 진정한 소통의 도구로서 작동한다는 희망 만땅의 긍정과는 다른 방향, 즉 누대에 걸친 공동체 자체의 자연적인 치유력이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씨름 선수단이 자랑인 바닷가 어느 군 단위 마을에 씨름판을 둘러싼 외지인들이 들락날락하면서 이들과 마을의 갈등은 어느 틈에서든지 벌어지기 마련이고 그 배타성과 폐쇄성이 이 고장의 쇠락을 불러왔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두식과 미란이 20여년이 지난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해도, 그래서 20년 전과는 다르게 마을의 이방인이나 타자가 아닌 선대의 인연 속에 주체로서 안착한다 해도, 이제 세상은 모두 시골마을과 같은 수준의 불필요한 밀착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됐다.

스마트폰이라는 세계를 등에 짊어지고 있는 이상, 셀룰러폰을 집어던지는 용기가 오히려 유년 시절의 복구보다 좀 더 효과적인 안식의 길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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