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와 뱀과 비둘기’ 중국, 한국이 아닌 미국을 좇다 [영화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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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와 뱀과 비둘기’ 중국, 한국이 아닌 미국을 좇다 [영화와 경제]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4.04.04 16: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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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와 뱀과 비둘기’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돼지와 뱀과 비둘기’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어떤 국가가 외부의 여러 압력에 굴하지 않고 버텨내서 민주적 절차를 완성해 나갈 때 문화 또한 크게 융성한다. 물론 제국의 말기에는 개방된 문호를 폐색하기 직전에 단말마처럼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울기도 한다.

올해 초 총통 선거에서 중국의 공개적 개입에도 타이완 독립을 주장하는 후보를 당선시킨 타이완 영화가 가끔 보여주는 폭력에 대한 성찰은 섬찟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장엄하기도 하다.

우리 앞에 나타난 웡칭포 감독의 <돼지와 뱀과 비둘기>는 폭력을 수단으로 삼거나 폭력에 전적으로 의존하거나 배후에서 위선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인간 군상의 어쩔 수 없는 모습이지만, 공간적 과잉(spatial overabundance)을 포섭할 수 있는 ‘시간적 과잉’(overabundance of events)을 갖고 있는 대륙에서 벗어나 ‘자의식 과잉’(the individualization of references)에 부유하는 타이완 젊은이들의 공허함을 드러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는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조건들의 본질적인 특징을 세 가지 과잉으로 다루는 데,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가져다주는 공간의 축소에서 비롯되는 ‘공간적 과잉’은 슈퍼 모더니티 이전에도 지중해를 둘러싼 유럽과 아랍 문명의 충돌과 혼합, 중국이 대양으로 진출하기 전에 좌절시키는 동남아시아의 원시적 힘, 미국의 플로리다 해변과 쿠바의 아바나, 카리브해를 둘러싼 나라들에서 방출되는 열대의 에네르기에서 이미 보아왔다.

현대에 와서는 지구 전체가 이러한 ‘공간적 과잉’ 속에서 경제적 욕망을 비롯한 서로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한 각축장이 되어 충돌하고 있지만, ‘시간적 과잉’ 즉, 역사적 사건들의 내러티브 과잉을 갖추고 있는 나라들은 공고하다.

달리 말하면, 태환 없는 화폐·금융자본주의 시대를 주도하고 항공모함, 인공위성, 인터넷, 블랙버드로 21세기 공간축소의 첨병 노릇을 하는 기축통화국 미국과 지구화 시대 자기만의 플레이리스트(the individualization of references)를 갖고 있는 개인들의 자의식 과잉에 재갈을 물리는 국가주의를 동원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들의 범람 속에 있는 중국이,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두고 대격돌하고 있는 것이 현재이다.

오랫동안 중국은 우리 한국을 주시하며 따라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한국의 기재부가 주도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 대신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와 월가가 주도하는 화폐·금융자본주의를 일정 부분 차용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한 저력이 우리 내부의 문화적 잠재성보다는 미국식 구조조정을 감내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지방정부의 재정 부실과 거품에 파묻힌 부동산 산업의 구조조정을 코로나19 팬데믹과 맞물려 가속함으로써, 부동산 시장으로의 자금 유입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제조업과 IT산업으로 몰아줌으로써 산업구조의 재편을 서두르는 것이다. 주식시장 등 자본시장에서의 파이낸싱에 서툴더라도 계획경제의 일관성을 금융감독관리총국과 은행을 통해서 관철하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은 내수가 충분한 완전시장(perfect market)이고 기축 통화국이거나 준기축 통화국이기 때문에, 자국 시장 안에서의 기업혁신을 자본주의의 본질적 현상인 공황을 경기변동순환에 내재화하는 과정에 일치시키는 정책에서, 사실상 동일해지는 것이다.

과거 소련이나 일본의 관료가 주도하는 기획 경제, 그리하여 경기변동순환의 한 사이클을 그대로 소모하는 버티기 대신 미국과 중국의 화폐·금융자본주의에 최대한 근접함으로써 자본시장과 중앙은행의 역할을 새롭게 받아들일 때가 된 것이다.

또한 일본 청년의 조로(早老)나 타이완 젊은이들의 공허를 뿌리치고 다시 세계로 뛰쳐나감으로써, 왕조시대의 유생들처럼 기존 재벌 일가에 편입되어 입신양명을 추구하는 대신, 혁신 기업의 수장이 되겠다는 야심을 갖기를 바랄 뿐이다.

<돼지와 뱀과 비둘기>는 젊은 영화이기 때문에 우화적이고 단순하지만, 선명하기도 하여 폭력을 과도하게 있는 대로 사용한 자의 회한을 필연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삶은 보이지 않는 폭력과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인과의 굴레 속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더하여 슈퍼 모더니티 하에서는 ‘공간적 과잉’과 ‘시간적 과잉’을 버텨내기 위하여 ‘자의식 과잉’으로 맛집 리스트나 적어대며 부유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항공모함 안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숙명을 가진 자의 생존방식과 같다. 항공모함이 기항하는 항구나 도시, 해군기지 등의 리스트를 가지고 각 정박지의 특성을 미리 파악해서 영원히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이다.

연애 또한 그렇다. 돌아갈 왕국이 있고 그곳에서 처자가 기다리는 율리시즈의 항해와는 다른 것이다. <아비정전>의 아비가 말하는 “발 없는 새”나 최인훈의 <광장>에 나오는 이명준이 남과 북 어느 쪽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하여 배에 오를 때나 모두, 커다란 배 모양의 타이완 젊은이들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역마(驛馬)는 때가 되면 멈추지만, 엔진오일이 마르거나 내비게이션이 고장 나서가 아니다. 강물을 따라 차를 몰다 보면 라디오 소리, 바람 소리, 오래전 속삭였던 말소리가 하나가 되어 물 위에 반짝인다. 모퉁이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날아오르고 싶은 충동도 희미해지고 미지의 쾌감보다는 익숙한 상처에 먼저 공명하게 된다. 방어운전이 반복될 때 주체와 타자를 둘러싼 도덕적 전회(轉回)는 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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