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 고라니처럼 짖거나 재즈를 틀거나 [김경훈의 시네노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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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 고라니처럼 짖거나 재즈를 틀거나 [김경훈의 시네노믹스]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4.07.04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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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의 한 장면.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의 한 장면.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늦은 밤에 천둥이 치고 비가 합숙소 외벽을 두들기자 잽싸게 창문으로 열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을 빗소리만큼 틀어놓았다. 빗속에서 자유롭지만, 낮선 여관에서 창문을 열어놓은 채 무심코 잠들면 가위눌리곤 했다. 나중에는 어떻게 해서든 소리를 내질렀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다 보니 가위눌림은 없어졌다.

우리는 군사정권이 끝나면, 그리고 매체에 대한 접근 가능성이 공정해지면 ‘열린사회’가 펼쳐질 줄 알았지만, 여전히 숨죽이고 지내야 하는 순간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그것이 검·언복합체의 파워든, 상업주의에 포획되거나 구독자 수에서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는 빈약한 에고든 우리는 형식 논리적인 법규나 도덕, 상식 따위를 성찰의 수단이 아닌 칼로 사용한다.

그것이 시장에 대한 이해나 경제 운용 방식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변증법적 모순관계를 오로지 적대적 길항 관계로만 파악하는 오래된 습관에서는 더욱 첨예하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조용한 파산과 실업을 단지 자산 가격의 거품을 유지하기 위해 숨죽인 채 방관한다면, 우리는 필연코 다른 종류의 종말적 상황을 겪게 될 것이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은 오래전 <샤인>이라는 영화에서 듣게 되었는데, 아직은 어린 연주자가 관능 없이는 도달할 수 없는 절정을 오로지 집중력만 갖추고 돌파한 순간, 그렇게 폭발한 순간, 관객들은 오히려 에로스적 열기에 사로잡히게 된다. 미적인 혼란은 여름날 맥주 한 병처럼 체온을 환기할 때 요동치는 누빔 점처럼 짜깁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외환위기를 맞이했다.

경제 현상도 서로 대립하는 전망이 요동칠 때 비로소 위험을 조정하며 균형점을 찾게 되는데, 지금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와 재무부의 작난(作亂)이 이미 미스터리의 영역에서 방정식의 영역으로 착지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누빔 점에서 균형을 찾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

또 한 번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이 영화 속에서 들려온 것은 <혈의 누>에서 강 객주의 딸이 밀고자들을 피해 필사의 탈주를 할 때이다. 결국 그녀는 밀고자들이 쏜 화승총에 맞아 절벽에서 떨어지게 된다. 그 밀고자 중에 두호가 반전이었는데, 그는 강 객주가 “신분이 아닌 능력으로 사람이 나누어지게 되는 시대가 온다”라며 제지소 일을 맡긴 떠돌이 고아였다. 그들 모두에게 의식이 시대의 공기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시험은 난관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세계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금융위기의 발작을 겪어야 했다.

지금 세계는 미·중 간의 패권 다툼, 그 균열에서 피어나는 지정학적인 분쟁으로 예정된 파국을 향해 서서히 다가가고 있다. 중국이 과거 독일이나 일본, 소련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은 역사적인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자본가들이 충분히 자율적이고 중국 시장이 충분히 개방되어 세계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안에 충분히 편입된다면, 초국적 자본 혹은 시장은 평화를 선택할 것이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처럼 불현듯 세계의 도시들이 시가전에 휩싸이기 전에 우리는 생각보다 길게 숨죽이며, 광범위하고 배타적인 종교운동이나 선민의식을 동원하는 피해망상적인 민족주의, 상징적인 문화자본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젠더 갈등, 그리고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초국적 투기자본의 불안정성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것이다.

희망은 성숙하고 고양된 주체들의 커뮤니케이션에 있다. 주체는 의사소통에 따라서 보정되며 비로소 합리성을 실재계에 내려보낸다. 하지만 숨죽인 사회에서의 의사소통은 늘 왜곡되고 담론을 형성하기 위한 피드백이 제한되기 때문에, 주관적 이성은 객관적 이성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지체되며 말초적으로 소비된다.

결국 의사소통의 해찰이나 억압은 전체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누군가 도식적인 합리성에 가위눌려 있다면 깊은 밤 고라니 소리처럼 “악”하고 소리 질러보라, 우리가 이미 전체주의의 폭력 앞에 길들인 사회가 아니라면 안전이 아닌 참여와 실천의 장으로 나가게 된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첫째 날>의 사미라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괴물들에게 니나 사이먼의 <Feeling Good>을 틀어준다. 소음과 재즈가 무차별한 상대방이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음악을 던져 놓는다.

사미라는 암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에릭 혼자만 강의 보트에 올라타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죽음을 받아들이며 “악” 소리 대신 재즈를 튼다. 재즈 연주자였던 그녀의 아버지가 아직은 차별적 시선이 불편하게 남아있던 시절 피자집 근처 술집에서 연주했던 피아노처럼,

400년 전 아프리카 초원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백인들에게 사냥당해 미국으로 끌려가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예로 일하면서 부르기 시작했던 노래와 춤을, 백인 농장주가 아닌 모든 소리를 짓누르는 억압적 존재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100년쯤 지난 어느 날 그 괴물들이 여전히 지구를 떠나지 않고 있다면, 음악과 소음을 구별하고 인류에게 손을 내밀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아는 아프로-아메리칸들의 저항방식이었고, 끝내 그들이 쟁취하였던 자유의지와 인간 조건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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