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할 권리 [최준영의 낮은 곳의 인문학]
상태바
가난할 권리 [최준영의 낮은 곳의 인문학]
  • 최준영 책고집 대표
  • 승인 2023.06.19 14: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역자활에서 인문학 강좌를 열었던 때의 일이다. 1년 기간의 과정을 마칠 때쯤 수학여행을 가기로 하고 매달 1만원씩 모았다. 1년이 지났을 무렵 제법 큰 돈이 모였다. 언제, 어디로 갈 것인지만 정하면 될 일이었다. 제주도 얘기도 나왔고, 강원도 바닷가 얘기도 나왔지만, 현실적으로 어림없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1박 2일 일정으로 경기도 북부의 모 계곡으로 가기로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수학여행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여행 날짜를 이틀 남기고 변고가 일어났다. 하필이면 우리가 가기로 한 곳에 많은 비가 쏟아져 수해가 난 것이었다. 수백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속보로 뜨고 있었다. 긴급 대책회의를 해야 했다. 까짓 여행지를 바꾸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었지만, 수해로 난리인 마당에 어디로 가든 마음 편치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급기야 여행을 가기보다 우리가 모은 돈을 수재의연금으로 내놓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기로 했다.

우리 마음과 달리 수해 속보에선 어이없는 소식이 잇따르고 있었다. 도처에서 수해가 발생해 이재민이 속출하는 가운데 국회의원과 지자체장은 수해 지역을 방문하는 대신 골프장을 찾았고, 지방의원들은 속속 해외여행에 나섰다는 뉴스였다.

과연 누가 더 부자인가. 가난한 엄마들이 수학여행을 꿈꾸며 1년 동안 모은 돈을 수재의연금으로 내놓을 때, 돈 많은 사람들은 골프장을 다니고 해외여행에 나섰다. 내 생각에 진짜 부자는 우리였다. 적어도 마음 씀씀이로만 보면 확실히 우리가 부자였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마음도 가난하리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되레 돈은 많아도 마음은 가난한 사람이 부지기수다. 비록 돈은 없을망정 마음만은 부자인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인문학 강좌를 이어간다.

몇 년 전 송파에 사는 세 모녀가 집주인에게 집세와 공과금 70만원을 남겨둔 채 동반 자살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어느 30대 주부는 네살배기 아들과 함께 아파트에서 몸을 날려 자살했다. 자살한 주부가 남긴 마지막 말은 세금 고지서에 적혀 있었다. 2건의 뉴스를 접하면서 자살 사건이면 으레 나오기 마련인 생활고니, 우울증이니 하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어이없게도 집세, 공과금, 70만원, 세금 고지서 등 낯설고 어색한 말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 낯선 말들이 여지없이 흉통을 유발했다.

월세는 선입금이 상례다. 집세를 밀린 적이 없는 세 모녀가 유서처럼 남겨놓은 그 돈은 살았던 기간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기간에 대한 대가를 미리 낸 것이다. 공과금도 마찬가지다. 사용한 것에 대한 대가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앞으로도 계속 사용하겠다는 약속의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세 모녀의 동반자살은 단지 경제적 어려움을 면피하려 했던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의지를 가졌던 세 모녀는 그러나 차가운 주검으로 뉴스에 등장했다.

세 모녀의 절망은 단지 생활고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보증금을 넣어두었을 테니 남기고 간 70만원이면 얼마간은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친 팔이 낳으면 다시 일터로 나가 생계를 이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직 살지도 않은 기간의 월세를 미리 내고, 계속 사용하겠다는 의미가 담긴 공과금을 준비해 놓은 뒤 죽음을 선택했다. 정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건 죽음을 다짐한 순간,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존재론적 상실감, 삶의 허무와 고통을 생각하는 대신 월세와 공과금을 떠올리고 있는 그들의 착하고 순한 마음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이란 늘 그런 식이다. 쉽사리 어려움을 드러내기보다는 혹여 누군가에게 폐를 끼칠까 염려한다. 신세를 지게 될 것이 두려워서 더 깊고 더 좁은 곳으로 몸을 숨긴다. 그런 그들을 강제로 끌어내 어설픈 도움을 주겠다고 설치는 건 어떤 의미에선 그들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일인지 모른다. 그러니 스스로 나서지 않는 한 그들을 도울 방법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속엔 항상 그런 자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으로서의 염치마저 내려놓으면 그건 사람도 아니라는 자학적 도덕률을 품고 있다. 그런 마음은 결코 우연히 형성된 것이 아니다. 가난을 내면화하고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인식하도록 강요한 사회 분위기와 그것을 정당화해주는 개발주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씁쓸한 풍경이다.

오래도록 우리 사회를 관류했던 성장 이데올로기는 국민을 국가의 주체로 여기지 않는다. 국민은 그저 개조의 대상이거나 소모적 수단이었을 뿐이다. 국민이면서 주체가 아니었던 터라 성장의 과실은 고스란히 소수의 권력층과 그에 편승한 기업들의 차지가 되고, 국민 일반은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산업화가 낳은 병리가 곧 소외이며, 그것은 곧 가난과 불운과 불행의 구조화 혹은 내면화로 이어졌다. 이제 국민은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알아서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국민은 시쳇말로 선진국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니다.

와중에 ‘복지’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세 모녀와 그 주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리려 했을 것이다. 두근두근했을 것이고,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그러나 들려오는 얘기라니 만만치 않다. 나이가 어떻고, 소득수준이 어떻고, 피부양자의 자격이 어떻고. 말들도 어렵고 따지는 것도 많으니 결국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려니 생각하며 포기했을 것이다. 암에 걸렸던 남편은 빚만 남기고 죽어버렸다. 마음의 문은 더욱 굳게 닫혀버렸다.

‘일할 수 없으면 죽어야 해. 대신 남에게 폐는 끼치지 말아야지.’ 그리 생각하는 것이 국민 된 도리이고, 그게 또한 인간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라 굳게 믿었을 것이다.

나날이 파편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사적 안전망은 작동을 멈춘 지 오래다. 그를 대체해야 할 사회적 안전망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앉아서 기다리는 복지여서는 안 된다. 우선 할 일은 가난한 사람들의 내면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이어야 한다. 동정이 아닌 권리로서의 복지를 이해하도록 설득하고 설명해야 한다. 복지는 가난한 사람들의 마지막 권리를 지켜 주는 일이다. 세상에는 욕망할 권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겐 가난하지만 살아가야 할 권리가 있다. 가난할 권리라는 역설은 앞서 살펴본 가난한 사람들의 순한 마음 속에 담긴 최후적 권리이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