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보다 서러운 ‘가난의 대물림’ [최준영의 낮은 곳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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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보다 서러운 ‘가난의 대물림’ [최준영의 낮은 곳의 인문학]
  • 최준영 책고집 대표
  • 승인 2023.07.20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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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성프란시스대학이 출범한 이후 노숙인 인문학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이듬해 도처에서 인문 강좌를 개설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중 몇몇 곳에선 내게 조언을 요청했고, 직접 강의해 참여해달라는 곳도 있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곳이 관악인문대학이다.

관악인문대학은 서울 관악구 난곡동 인근의 저소득 주민들이 작은 사업단을 꾸리고 있는 자활센터에서 설립했다. 이곳에서도 첫 강의는 내 몫이었다. 강좌 초기에는 수강생들끼리도 서로를 알지 못했다. 대체로 분위기가 좋았지만, 수강생들 사이에서 신경전이 벌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일테면, 누가 옷을 좀 야하게 입고 왔다든지, 화장을 진하게 하고 오는 날엔 어김없이 지청구가 날아들었다. “미친X 공부하러 온 거야, 누구 꾀러 온 거야?” 당황스러웠지만 어찌해 볼 수 없는 일이었다. 화가 많고 말이 거침없는 분들이려니 하며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그때만 해도 빔프로젝터가 아닌 화이트보드에 글씨를 쓰면서 수업했다. 문학 과목을 맡은 나는 매시간 보드에 삐뚤빼뚤 시 한 편을 적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날도 같은 방식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화이트보드에 시 한 편을 적고 있을 때였다. 난데없이 뒤통수로 욕이 날아들었다.

“개XX, 나쁜XX”

어찌 된 일인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뒤통수로 욕을 얻어먹어야 한단 말인가. 바로 돌아서려다 멈칫했다.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될 일, 우선 냉정해야 했다. 천천히 돌아서서 강의장의 모든 수강생을 일별한 뒤 욕을 한 당사자를 찾아봤다. 범인 색출에 실패했다. 잘못 들었으려니, 보드 쪽으로 몸을 돌려 시의 나머지 부분을 적기 시작했다. 다시 같은 욕이 날아들었다, 뒤통수로.

“개XX, 나쁜 XX”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발본하지 않고선 강의를 진행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했다. “누구십니까? 대체 무슨 일이기에 강의 시간에 욕을 하십니까?”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거기, 고개를 떨군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가여운 영혼이 앉아 있었다.

평소 말이 없는 분이었다. 강의 중 질문에도 거의 마지못해 대답할 만큼 수줍음이 많은 분이었다. 그런 분이 강의 시간에, 그것도 하필이면 내 뒤통수에 대고 욕을 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그분 표정을 살필 필요가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 있다. 이유가 뭔지 몹시 궁금했지만 당장 물을 상황은 아닌 듯했다. 1교시가 끝나고 두 번째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질문을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말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자신 때문에 강의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다는 걸 안다는 듯 조심스럽게 일어서서 사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덕분에 두 번째 시간은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열여섯 살에 무작정 상경해서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열여덟 살에 동네 어귀의 철공소에 다니는 청년과 눈이 맞아 살림을 시작했고, 아이 셋을 낳았다. 가난했지만 나름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몇 년 전 남편이 집을 나갔다. 딴 살림을 차린 것이다. 가난에 더해 불안한 나날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생계가 막막했다.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자활에 참여해 간병 일을 하게 되었다. 형편은 어려웠지만, 남편의 소득이 잡히니 혼자 아이 셋을 키우는데도 수급자가 되지 못했다.

미친 듯이 일했다. 새벽엔 우유배달을 했고, 주간엔 자활에 나와 간병인으로 일했다. 그렇게 해도 아이들 셋을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고등학교 2학년인 큰딸이 일찍 철이 들어서 엄마를 도와주는 거다.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 동네에서 ‘알바왕’으로 통했다. 전단지를 돌려도 다른 아이보다 빠르게 더 많이 돌린다. 큰딸은 그렇게 늘 엄마를 도왔고, 엄마를 지켜주었다. 자신은 스스로 알아서 대학에 들어갈 테니 엄마는 동생들만 돌보면 된다며 엄마를 안심시키기도 했다. 둘째는 중 2, 막내는 초등학교 6학년이다.

문제는 아들인 둘째였다. 어느 날, 아니 오늘 일어난 일이다. 모처럼 집에 일찍 들어갔는데 그 시간 학교에 갔어야 할 둘째가 집에 있었다. 이불 속에 있는 아이를 일으켜 세웠더니 얼굴에 상처가 보였다. 무슨 일이냐고 채근하니 마지못해 하는 말이 계단에서 넘어졌다고 한다.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대체 누구한테 맞은 거냐고 다그쳤다. 돌아온 답이 어이없다. 학교 다니기 싫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이번만이 아닌 것 같았다. 오래전부터 친구들에게 ‘왕따’당해 온 눈치였다. 한사코 말리는 아이를 뿌리치고 학교로 갔다. 담임 선생님을 만나서 하소연이라고 해보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둘째 아이들 셋을 키우며 학교라는 곳에 가 본 적이 없다. 교무실이 어딘지를 몰라 헤매야 했고, 겨우 담임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 아이가 오래전부터 아이들에게 맞고 따돌림을 당해 온 것 같은데, 선생님은 모르셨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러나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모기 같은 목소리로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폭행당했다는 말을 겨우 했다.

담임 선생님의 반응이 충격적이었다. 설마 그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심지어는 별것도 아닌 일로 귀찮게 한다는 듯 아주 짧게 말을 받았다.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는 거였다. 그러더니 이내 몸을 일으켰다. 다음 수업에 들어가야 하니 어서 돌아가란다.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몸이 굳은 듯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교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밀려드는 상실감과 허탈함, 서러움을 감당할 수 없어서 몸이 몹시 무거웠다. 겨우 교무실을 빠져나와 교문 쪽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걷다가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리가 풀렸던 모양이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입에선 욕이 튀어나왔다. “개XX, 나쁜 XX”

인문학 강의실에 들어와서도 분이 풀리지 않아 정신이 나간 것처럼 그 욕을 되뇌었다. 그러다 교수님에게 들켜서 이 자리에 서게 됐다. 오늘 강의를 망치게 해서 미안하다. 죽을죄를 지었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하겠다. 정말 미안하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개XX, 나쁜 XX”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고, 곧 합창이 되었다. “개XX 나쁜 XX, 개XX 나쁜 XX, 개XX 나쁜 XX”.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심지어 고개를 들고 천장을 바라보며 통곡하는 이도 있었다. 말을 마칠 무렵 몇몇은 그에게 다가가 안아주기도 했다. 안은 채 함께 울었다. 모두가 울었다.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둘째 시간을 송두리째 울음으로 채웠다.

그분의 아픈 고백이 있고 난 뒤 강의실 분위기가 달라졌다. 수강생끼리 더는 싸우지 않았다. 욕을 하지도 않았고, 서로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비로소 알게 된 것이었다. 저리 웃고 있어도 다 사연이 있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걸. 화장을 짙게 하는 건 얼굴의 흉터를 가리기 위해서라는 걸 이해하기 시작했고, 옷이 화려한 건 되레 가난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달라진 건 함께 일을 해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었다. 한 팀은 꽃가게를 열기로 했고, 다른 한 팀은 돼지 곱창을 메뉴로 하는 선술집을 차리기로 결의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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