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노숙인의 ‘살아야 할 이유’ [최준영의 낮은 곳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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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숙인의 ‘살아야 할 이유’ [최준영의 낮은 곳의 인문학]
  • 최준영 책고집 대표
  • 승인 2023.04.25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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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사진=이미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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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 지 10여 년이 지났어도 전화가 온다. 초창기 노숙인 인문학에 참여했던 분들에게서다. 첫정이랄까, 오래된 인연일수록 더 애틋하고 정감이 간다. 전화는 주로 성프란시스대학 1기와 2기 수료생들이 한다. 아쉽기는, 주로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간에 전화한다는 것.

통화내용은 한결같다. 일단 서로의 안부를 확인한다. 이어지는 대화는 대부분 돈 이야기다. 돈 좀 꿔달라는 거다. 말이 빌려달라는 거지 실은 좀 도와달라는 뜻인 줄 안다. 요구 액수가 크지 않으니 되도록 보내주는 편이다.

3만원 혹은 5만원. 중년의 남자가 한밤중에 전화해서 돈을 꿔달란다. 30만원, 500만원이 아니다. 고작 3만원이나 5만원을 부탁한다. 그게 뭘 의미하는 줄 안다. 밥을 못 먹은 거고, 한기를 녹일 잠자리를 구하지 못한 거다. 거부하기 힘들다. 보내줄 수밖에 없다.

이씨에게서 전화가 온 건 뜻밖의 일이었다. 성프란시스대학 1기 반장을 맡으셨던 분이다. 대학을 졸업했고 한때 규모 있는 사업을 하던 분이다. 인상도 점잖고, 무엇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다. 일테면, 겸손한 분이고 인품이 느껴지는 분이다. 비록 거리의 삶을 살고 계셨지만, 몸가짐도 옷매무새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는 기품이 있는 분이다. 그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어이쿠 반장님, 반갑습니다.”

“교수님, 참 부끄럽고 죄송한 말씀인데 저한테 혹시 5만원 정도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아, 네. 계좌번호 알려주세요.”

그렇게 첫 거래(?)가 이루어졌다. 두어 달이 지났을까 다시 전화가 왔다. 같은 내용이었다. 5만원을 빌려달라는. 기꺼이 보내드렸다. 그로부터 한동안 잠잠했다. 사실 돈을 요구한 분들의 행동 패턴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일단 돈을 꿔가면 한동안 연락을 끊는다. 길게는 1,2년 짧게는 6개월 정도 연락하지 않는다.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났다 싶을 무렵 다시 전화해서 같은 요구를 한다. 시간이 지났으니 그 전의 것은 잊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게 어디 그런가. 이씨 역시 같은 패턴이었다. 5만원, 2개월 후 다시 5만원, 연락 두절.

6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10만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역시 군소리하지 않고 보냈다. 돌려줄 거라 믿은 게 아니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려니 싶었다. 이후 연락이 오지 않았다.

1년여 시간이 지났을 무렵 이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에도 돈 얘기를 꺼내면 좀 다르게 대응하겠다고 마음먹으며 전화를 받았다. 우선 안부를 물었다. 돌아온 대답에 생기가 느껴졌다. 생기를 넘어 여느 때와 달리 밝고 큰 목소리, 일테면 의기양양하다 느껴질 정도였다. 이유를 곧 알게 되었다.

“교수님, 제가 방금 교수님 계좌로 30만원 넣었습니다.”

윗글을 읽은 분이라면 그간 이씨가 내게 얼마를 가져갔던지 단박에 합산이 되었을 것이다. 이씨가 내게 보낸 돈은 가져간 돈에 10만원을 보탠 액수였다. 의아해서 물었다. 왜 30만원이나 보내셨냐고. 돌아온 대답이 정겹다.

“교수님, 어머님께 맛난 것 사주시든지, 저처럼 괴롭히는 친구들 도와주시든지, 알아서 하세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고, 어디서 돈이 생긴 거냐고. 즉각적인 답을 하진 않으셨다. 대신 조만간 1기 동기들과 한번 놀러 갈 테니까, 시간 비워두라는 답변이 돌아왔을 뿐이다.

해가 바뀌고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이씨와 함께 3명의 1기 졸업생들이 찾아왔다. 만난 지 10년이 지난 뒤에도 잊지 않고 찾아와 준 것이 반갑고, 고마웠다. 막걸릿잔이 몇 순배 돌았다. 거나하게 취기 오른 얼굴로 서로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아직은 희망이 남아 있음을 증명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그제야 이씨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2년 전이었을 겁니다. 서울역 인근의 전봇대에 붙어 있는 구인 광고를 보자마자 떼어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연락했죠. 대형트럭을 운전할 기사를 구하는 광고였어요. 내가 해보겠다고 하니까 차주가 만나자더군요.

며칠 후 되도록 말끔한 복장으로 의정부에 있는 차주를 찾아갔어요. 70대가 훌쩍 넘은 어르신이었는데 정정하시더군요. 제가 해보겠다고 말했고요. 차주는 내 나이를 듣더니 좀 망설이는 눈치였어요. 아직은 건강하고 눈도 밝다고 말씀드렸죠. 그때 제 눈빛이 살아 있었나 봐요. 일단 해보라는 허락을 받아냈어요.

문제는 그다음이었어요. 실은 운전면허가 말소된 상태였거든요. 게다가 대형트럭을 몰려면 대형면허가 필요했으니 완전 부적격자였던 거죠. 사실대로 말씀드렸어요. 써주기만 한다면 대형면허를 따내겠다고. 처음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시더라고요. 당연한 반응이죠. 운전기사를 뽑는데 운전면허가 없는 사람이 일을 시켜달라고 보채는 꼴이었으니.

믿기지 않겠지만 그 차주분 저를 좋게 보셨나 봐요. 면허를 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순간, 은인을 만난 기분이었어요. 저를 믿어준 것이 어찌나 감사하던지 그 뒤로 열심히 학원 다녀서 면허를 땄지요.

면허를 따면 곧바로 운전을 할 수 있는 줄 알았어요. 아니더군요. 일단 조수부터 해야 한다는 거예요. 워낙에 대형트럭이라 직선주로로만 달려야 하고 의정부에서 울산까지 장시간 운전을 하는 일이라 조수 생활하면서 길도 익히고 거래처 사람들과도 알아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조수 생활을 시작했죠.

그 시절 교수님께 연락했던 거예요. 조수 생활 중에는 급여라는 게 없고, 낯선 곳에서 혼자 잠을 자려니 술 생각도 나고, 결국 교수님께 5만원, 5만원, 10만원을 부탁드렸던 거죠. 군말 없이 보내주실 때마다 어찌나 고맙고 죄송했는지 몰라요. 돈 벌게 되면, 제일 먼저 교수님께 돈을 부쳐드리겠다고 다짐했고, 정식 운전기사가 된 뒤 첫 월급 받은 날 이자 10만원을 붙여서 30만원을 보냈던 겁니다.

감동적인 사연이었다. 그러나 감동은 뒤로 하고 우선 궁금증부터 해소해야 했다. 운전면허도 없이 운전기사 구인 광고를 보고 연락을 했다는 게 도시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 사람을 또 면허를 딸 때까지 기다려준 차주의 마음 씀씀이 또한 믿기지 않았다. 도리없이 질문을 던져야 했다.

“세상에나 면허도 없이 운전직에 도전하셨다니 믿을 수가 없네요. 그런 용기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요.”

돌아온 대답이 결국 나를, 아니 그 자리에서 함께 듣고 있던 모두를 울리고 말았다.

그게 당연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실 테죠. 그러나 사실입니다. 교수님께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거리에 쓰러져 있던 저를 일으켜 세운 사람이 두 명 있습니다. 그중 한 분이 교수님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제 딸입니다.

어느 날 제가 기거하는 쪽방으로 딸아이가 찾아왔더군요. 저 찾느라고 고생 많이 했다더군요. 전국의 노숙인 쉼터를 샅샅이 뒤졌다는 거예요. 그러다 서울역 인근 다시서기지원센터를 통해 제가 인문학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주저 없이 찾아온 거죠.

사업에 망하고 죽지 못해 살다가 결국 집을 뛰쳐나온 게 5년 전입니다. 집을 나설 당시 대학생이었던 딸은 그 사이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답니다. 직장인이 된 뒤 줄곧 저를 찾기 시작했고, 5년 만에 결국 찾아낸 거죠.

딸아이와 참 많이 울었습니다. 눈이 퉁퉁 부은 채 딸아이가 말을 하더군요. 곧 결혼한다고, 결혼식 때 식장에서 아빠 손을 잡고 입장하고 싶다고. 멀쩡히 살아계신 아빠를 두고 다른 사람 손 잡고 입장하는 슬픈 신부가 되고 싶지 않다고. 돈 없는 아빠여도 좋으니까, 그때 꼭 와달라고.

딸이 돌아간 뒤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숱한 날 거리를 배회했고, 술도 많이 마셨지요.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글이 있었어요. 교수님이 성프란시스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소개해준 말이죠. 빅터 프랭클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나오는 철학자 니체의 말이죠. 그 문장을 필사해서 쪽방 벽에 붙여두었거든요.

“삶의 의미를 알면 어떤 상황(고통)도 이겨낼 수 있다.”

딸아이가 다녀간 후 한동안 방황했고, 결국 알게 되었죠.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 같은 것을요. 다시 일어서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으니까요. 딸 결혼식장에 꼭 가야겠다고. 못난 아빠지만 내 딸을 다른 사람 손에 넘길 수는 없다고.

그러던 어느 날 운전기사 구한다는 광고를 본 거예요. 사실 그것 말고도 구인 광고 볼 때마다 떼어왔어요. 면접 볼 때마다 번번이 퇴짜를 맞았지만 포기하지 않았죠. 일테면 오기 같은 것도 생기더라고요. 참 신기하더군요. 그 오기라는 게 생기면서 문득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되더라고요. 결국 도전해서 운전직을 얻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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