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깨진다, 고로 나아간다 [최준영의 낮은 곳의 인문학]
상태바
나는 깨진다, 고로 나아간다 [최준영의 낮은 곳의 인문학]
  • 최준영 책고집 대표
  • 승인 2023.08.24 13: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노숙인 강좌 초창기, “나는 깨졌다"를 선언하며 강좌에서 스스로 물러난 교수가 있다. 불과 한 학기만이었다. 비교적 반응이 좋은 강의였다. 그런데도 스스로 깨졌다며 물러나는 그분 모습을 보면서 내 심경도 복잡했다.

깨졌다는 게 뭘까?

짐작하건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세상 편한 강의가 대학 강의다. 또래의 학생들이 학점을 따야 한다는 같은 목표, 분명한 이유로 강의장에 들어온다. 더구나 교수의 권위를 보장하는 다층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곳이 대학이다. 입장이나 관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내 생각으로 대학에서 하는 강의는 참 편한 강의다.

노숙인 강좌는 어떤가?

일단 참여자의 연령대가 다양하다. 20대에서 60대, 심지어 70대까지. 학력도 천차만별이다. 겨우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에서부터 대학, 더러 대학원까지 다닌 사람도 있다. 직업도 다양하고 관심 분야도 다르다. 강좌에 참여한 이유도 제각각이다. 학점을 딴다거나 졸업장을 목표로 하는 대학생과 달리 강좌에 참여한 노숙인에겐 이렇다 할 목표가 없다. 밥 준다고 해서 왔고, 강의 듣는 시간을 근로 시간으로 인정해 준다고 하니 오고, 시설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라 억지로 듣기도 한다. 마지못해 듣지만 지겨워 죽겠다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는 분도 있다.

그분들 앞에서 강의해야 한다. 어디다 기준을 맞춰야 할지,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할지, 준비한 강의를 밀어붙여야 할지, 임기응변으로 대처해야 할지. 난데없이 싸움이 일어나면 어찌할지, 느닷없는 질문에 제대로 대처할 수는 있을지. 늘 뒤숭숭한 마음으로 겨우겨우 견뎌내야 한다.

그뿐인가. 신발 밑바닥에 박힌 압정처럼 뾰족하고 날카로운 질문도 튀어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기본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존재론적 고민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분들이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데다 공격적인 질문도 서슴없이 던진다. 현실의 불만과 피해의식, 세상을 향한 적개심을 애꿎은 교수한테 쏟아낸다.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스스로 ‘깨졌다’라고 선언하며 물러난 분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는 분도 있었다. 명문대 교수이며, 소위 문화 권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분이었다. 그분 참 꿋꿋했다. 어찌나 꿋꿋했던지 노숙인들과 전혀 소통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방적인 강의를 이어갔다. 그에 대해 문제 제기하면 그게 왜 문제냐며 되레 소리를 질렀다. 2시간 강의 중 1시간은 수강생에게 자기가 쓴 책 읽게 하고, 나머지 1시간은 자기 자랑하는 것을 때우는 식의 강의였다.

그걸 뒤늦게 알았다. 계기가 있었다. 1학기를 마치고 2학기에 들어가기 직전의 일이었다. 수강생 격려 차원에서 약소하게나마 1인 5만원 상당의 장학금(?)을 주기로 했다. 각 과목 교수에게 장학금 받을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분만 추천하지 않았다. 이유를 듣고 경악했다. 고작 10명 내외 앉혀놓고 한 학기 15번이나 강의를 했는데 수강생 중 단 한 명의 이름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름을 알아야 추천할 것 아니냐며 되레 화를 내는 것이었다.

여기도 사람이 모인 곳이다. 다양한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수강생이 저마다 다른 이유로 거리의 삶을 살게 됐듯이, 참여 교수들 또한 성향도 참여한 이유도 각양각색이었다.

나는 어떤 교수였을까?

교수라 불리지만 여러모로 자격이 미달이었다. 학위가 없다. 박사학위나 석사학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학사학위조차 없다. 학위가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학문적 기반이 빈약하다 보니 스스로 위축되곤 했다. 과연 내가 인문학을 강의할 자격이 되는지 의문스러웠다. 깨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스스로 '깨졌다'를 선언하며 물러나는 분이 멋져 보였다. 나야말로 늘 깨졌고 깨질 때마다 그만두고 싶었다. 그런데 버텼다. 그만둘 용기가 없어서 비겁으로 버텼다. 버티고 버티다 보니 나름 요령이라는 게 생기기도 했다. 요령이라지만 실은 마음가짐이었다. 부족한 공부를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기로 했다. 강의 없는 날엔 무조건 도서관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강의와 관련된 책이라면 무조건 찾아 읽었다. 두 시간 강의를 위해 일주일을 준비했고, 하나의 주제를 소화하기 위해 십수 권의 책을 독파하기도 했다. 그래도 부족하다 싶으면 이곳저곳 강좌를 찾아다니며 공부했다. 작가의 글쓰기 수업, 유명 학자가 하는 시민강좌, 동영상 강의 등 닥치는 대로 듣고 메모하고 정리하기를 반복했다.

교수로서 권위를 인정받으려 하기보다 실무자로 움직이는 길을 택했다. 저녁 강의가 있는 날이면 오전부터 나가서 복지사 업무를 도우며 소위 ‘노숙판’의 척박한 현실에 대해 익혔다. 강의가 없는 날에는 복지사와 함께 야간에 거리로 나가 ‘아웃리치’를 했다. 수강 노숙인들과 함께 밥을 먹었고, 강의 후에는 함께 술 한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더러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거리에서 함께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그분들께 다가섰고, ‘라뽀’(rapport, 신뢰 관계)를 형성하려 애썼다. 덕분에 신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쯤 강의는 문제도 아니었다.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하게 되면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서로를 인정하게 되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형님이라 불렀고, 어린 친구는 나를 형 대하듯 했다. 매년 한 번씩 가는 수학여행에는 반드시 참여했다. 여행 전날에는 어머니와 아내를 동원해 수십 줄의 김밥을 싸서 들고 갔다. 수강생이 죽음을 맞으면 상주를 자처해 장례를 치렀다. 그렇게 함께 어우러졌다.

어느 순간 그분들과 구분되지 않는 존재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거리의 인문학자’라는 거창한 별명은 함께 라디오 방송을 했던 이수경 아나운서가 붙여주었지만, ‘거지 교수’라는 별명은 노숙인들이 붙여줬다. 내가 더 거지같이 생겼다면서.

나는 늘 깨졌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더 많은 시간 함께 하려고 노력했고, 공부했다. 덕분에 많이 성장했다. 노숙인 인문학의 가장 큰 수혜자는 노숙인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공부도 부족하고 품성도 엉망이었던 내가 어느새 어지간한 사람이면 알만한 사람이 된 것은, 등단 작가라는 그럴싸한 정체성 때문이 아니라 노숙인 인문학에 참여한 덕분이었다. 지금도 나는 늘 깨진다. 덕분에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