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판 붙어 볼까? (탈학교 청소년 학교의 추억) [최준영의 낮은 곳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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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판 붙어 볼까? (탈학교 청소년 학교의 추억) [최준영의 낮은 곳의 인문학]
  • 최준영 책고집 대표
  • 승인 2023.01.24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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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나 기자에게서 그동안 했던 강의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강의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생각해 보니 근 20년 동안 참으로 많은 곳에서 강의했다. 노숙인, 미혼모, 한 부모 여성 가장, 자활참여자, 어르신, 장애인, 탈북청소년, 탈학교 청소년, 교도소 재소자, 구치소 수감자에게 강의했고, 전국의 공공도서관과 작은도서관, 평생학습관, 각 지자체 인재개발원, 삼성전자, 몇몇 은행, 이런저런 대학들.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강의를 고르라면 단연 탈학교 청소년들과 함께 했던 이음학교의 추억이다. 서울의 모 구청에서 운영하는 고교 중퇴자를 위한 이음학교(학교 밖에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정해진 과정을 모두 이수하면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부여한다. 전국의 지자체에서 탈학교 청소년을 위한 이음학교를 운영하고 있다.)였다.

첫 수업 날부터 참담한 경험을 했다. 일단 아이들은 아무리 열정적으로 수업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수업 중 수시로 자리를 이동하고, 교사가 있든 말든 삼삼오오 모여서 잡담하거나 심지어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엎드려 자는 건 다반사고, 어쩌다 소리라도 높이는 날엔 곤한 잠을 깨웠다고 되레 교사에게 호통을 치며 대들기도 한다. 질문에는 제대로 답하는 법이 없고, 말을 걸어도 들은 척 만 척하기 일쑤다. 첫 수업 후 복도에서 만난 여학생에게 오늘 수업 어땠냐고 물었다가 봉변 아닌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돌아온 대답이라는 것이 이거였다. "오늘 수업이요? 좆 같았어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황당한 대답이다.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이 왜 강사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이들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오래 버티는 강사가 없었다. 정을 줘봐야 허사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고, 열심히 따라봐야 금방 떠날 사람이라고 단정하곤 했다. 마음을 열어봤자 자신들만 바보가 된다는 걸 여러 차례 경험한 아이들은 더 이상 강사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고, 강의를 열심히 듣지도 않았다.

탈학교 청소년을 모아놓은 그곳의 강사들 평균 수명(?)은 대체로 두 달을 넘지 않는다. 한 달도 못 견디고 도망치듯 그만두는 강사도 허다했다. 이유라는 것도 참 무책임하다. 아이들에게 질려서, 무서워서, 미워서. 심지어 정나미 떨어져서 더는 못 있겠다는 악담을 늘어놓고 달아나기 일쑤였다. 강사비가 터무니없이 적은 것도 이유 중 하나였을 테다. 책정된 강사비가 1시간 3만 원, 2시간 강의하면 6만 원이었다. 바쁠 땐 택시를 타기도 하고, 강의 준비에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그 정도 강사비를 받고 지속적으로 강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나는 달랐다. 거리의 노숙인과 교도소 재소자를 대상으로 강의하면서 ‘거리의 인문학자’라는 별명까지 붙은 사람이다. 강사비를 책정하지 못하는 가난한 마을공동체에서도 줄기차게 강의했던 터였다. 시쳇말로 탈학교 청소년들보다 훨씬 더 거칠고 비협조적인 사람들과의 자리에서도 거뜬히 버텨냈던 것이다. 별명, 그거 거저 얻어걸린 게 아니다.

버텼다. 버티고 버텨야만 했다. 집 나간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부모의 심정으로, 한껏 싸우고 토라진 아이들이 마음 돌릴 때까지 참아주는 삼촌의 마음으로, 마음 터놓을 수 있는 친구의 마음으로.

거칠고, 말썽꾸러기여도 아이는 아이였다. 수업 시간마다 엎드려 자는 건 그냥 공부하기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이유가 있었다. 밤새 주유소나 편의점, 주점 등에서 '알바'를 하는 아이들이었다. 언젠가 모 신문에서 명명했던 대로 이른바 ‘44만원 세대’가 바로 내 앞에서 자는, 혹은 딴청 피우는 아이들이다. 말이 거친 건 본디 심성이 그런 것이 아니다. 거친 환경 탓이다. 대부분 편부모 혹은 조손가정의 아이들이고, 더러는 어른 보호자 없이 동생들과 함께 사는 소녀 가장도 있었다.

다그쳐서 될 일이 아니었다. 기다려줘야 했고 참아줘야 했고 감싸줘야 했고, 더러는 매섭게 혼내줘야 했고, 무엇보다 힘껏 안아줘야 했다. 맞담배를 허해야 했고, 함께 술잔도 부딪쳐야 했다. 무엇보다 함께 울어줘야 했다.

참 힘든 시간이었지만 어찌어찌 견뎌냈다. 그새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서 별수 없이 우리는 서로를 인정해주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두 달을 버텨냈을 무렵이다. 그날 역시 죄다 엎드려 자거나 딴청을 피우며 강의를 들어주지 않았다. 강의를 마치고 허탈하게 비탈길을 내려오던 중 한 아이가 뒤에 따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선뜻 다가서지는 않았지만 그 아이도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수업 시간에 늘 딴청을 피우는 김윤수(가명, 17세)였다. 걸음을 멈추고 내게 다가오길 기다렸다. 가던 길을 멈추고 기다리는 나를 본 윤수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짓더니 쑥스러운 표정으로 내 앞에 뭔가를 내밀었다. 조그만 노트였다. 거기 빼곡하게 오늘 수업 내용이 정리돼 있었다. 씨익~ 웃더니 짐짓 자랑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선생님 수업 시간에 자는 척하지만 실은 다 듣고 이렇게 필기까지 했어요.”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엉뚱하다고 해야 할지. 버스정류장까지 10여 분을 걸어 내려오면서 윤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윤수는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아이들의 상황과 마음까지 대변하려고 애를 썼다.

나 : 듣지도 않으면서 필기를 해내는 특별한 기술이 있네.

윤수 : 제가 좀 특별한 데가 있죠.

나 : 그러게, 상담 선생님한테 들었어, 너희들이 어떤 상황인지.

윤수 : 그런데도 버티시는 걸 보면 선생님은 이전 선생님들과 한참 다른 분인 것 같아요.

나 : 윤수야, 나도 늘 혼자였어.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 검정고시 보고 겨우 대학 들어갔고. 너희를 나름 이해하는 편이지. 나도 막노동부터 서빙까지 안 해 본 ‘알바’가 없다니까.

윤수 : 역시.

나 : 내가 바라는 건 내 수업을 잘 들어주는 게 아니라 너희 모두가 이 과정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는 거야. 나도 보탬이 되고 싶고.

윤수 : (엄지척하며) 사실 선생님은 이미 인정받고 계신 거예요.

나 : 하하... 고맙네.

윤수 : 선생님, 저도 선생님처럼 대학에 갈 수 있을까요? 그러고 싶어요.

윤수의 말을 정리해 보면 아이들은 나 역시 금방 떠날 줄 알았고, 그래서 애써 무관심한 척했다는 거였다. 한 달 지나고, 두 달 지나도 떠나지 않으니 오히려 당황스러웠다고. 선생님의 진심을 알게 되었고, 그러니 수업 분위기도 차차 나아질 거라는 위로의 말까지.

잊을 수 없는 건 역시 마지막 말이었다.

“선생님 저도 대학 가고 싶어요.”

버스정류장에서 윤수와 헤어진 후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럴 수 있을까, 윤수와 아이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을까. 대학은 안 가더라도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텐데. 무력한 내가 뭘 도와줄 수 있을까. 드디어 아이들이 마음의 문을 열었구나. 고맙다. 우선 내 시간만이라도 분위기를 바꿔보기로 하자. 최선을 다하자.’

윤수는 이혼한 부모를 떠나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사실 대부분이 조부모와 살거나 이혼한 한 부모와 살고 있다고 했다. 학교에서는 적응하지 못했거나, 이런저런 일탈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퇴학당하거나 자퇴한 상태였다.

윤수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있었다. 반에서 ‘짱’ 역할을 하는 아이가 있다는 것. 지난번 첫 수업 후 수업 어땠냐고 물었을 때 황당한 대답을 했던 여자아이, 그 아이가 ‘짱’이었다. 열여덟 살로 나이도 윤수보다 많았고, 깡도 세고, 강단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따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업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짱’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짱’이 들으면 다른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따라 듣게 된다는 게 윤수의 조언이었다.

다음 날 수업 후 은영이(짱, 18세)에게 말을 걸었다. 이메일 주소 좀 알려달라고. 돌아온 대답이 예의 엽기적이다. “왜요, 저한테 메일로 작업 거시게요?”

그게 아니라고, 말로 하자고 하면 들어주지 않을 테니 메일로라도 대화하고 싶다고 부탁 조로 되물었다(사실, 아이들 메일 주소는 교무실에 다 정리돼 있다. 그래도 본인에게 직접 알려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뜩치 않은 표정으로 은영이가 자신의 메일을 적어주었다.

은영이는 학교에서 소위 일진이라 불리는 아이였고, 학교를 그만둔 뒤로도 학교 주변에서 아이들에게 돈을 빼앗고, 그 돈으로 유흥가를 전전하는 생활을 이어왔다. 은영이가 이음학교에 들어오게 된 것도 그야말로 엽기적인 이유에서였다. 이곳에 있는 다른 아이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이른바 ‘이지메’를 시켜서 더 이상 못 다니게 할 목적으로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김선지(여, 18세), 은영이와 같은 중학교 출신이다. 중학교 때 은영이와 절친이었지만 어떤 일을 계기로 둘은 원수처럼 지내게 되었다. 그 어떤 일이 과연 어떤 일인지는 끝내 알 수 없다.

선지는 엄마가 오랜 암투병 끝에 사망한 뒤 마음을 다잡았다. 더 심하게 방황할 수도 있었지만 선지에게는 어려서부터 친언니처럼 따르던 교회 언니가 있었다. 교회 언니가 하필이면(?) 탈학교 청소년 학교의 교사로 부임했고, 선지의 손과 마음을 잡아주었다. 세상의 모든 아이가 그렇듯 선지는 천성이 착한 아이였고, 누군가 진심으로 손을 내밀자 그 손에 이끌려 자신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욕망을 억누르는 성숙한 아이가 되었다.

선지의 변심이 은영이에겐 배신이었고, 그 배신감이 이 학교까지 따라오게 만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론 선한 마음이 선한 결과를 만들어낸 해피엔딩이 되길 바랐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수많은 우여곡절, 일일이 설명하기 힘들 정도다. 한편, 나와 몇 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은 은영이가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덕분에 내 수업 시간만큼은 활기차고 엄숙한 분위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모든 수업이 그렇게 변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교사들은 한 달이 멀다 하고 들락날락했고, 그런 교사들에게 아이들은 마음을 열지 않았다.

다음 해 2월 졸업식을 하게 되었다. 연초 스무 명 넘던 학생이 졸업식 땐 고작 다섯 명으로 줄어들었다. 아니다. 무려 다섯 명이나 그 힘든 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졸업생 다섯 명 중에는 윤수도 들어 있었다. 앞서 언급한 다른 아이들은 결국 졸업 때까지 함께 하지 못했다. 저마다의 이유로 모든 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 아이들 역시 졸업생 못지않게 나름의 성취를 이루어냈을 것이라고. 단지 졸업장을 받지 못했을 뿐.

다섯 명을 졸업시키기 위해 각 과목 교사들은 물론 무려 10명의 대학생 멘토가 함께 고생해주었다. 그렇게 수십 명의 노력 끝에 다섯 명의 아이가 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졸업식장은 그야말로 울음바다였다. 졸업생의 가족들이 울었고, 졸업생이 울었고, 모든 강사와 대학생 멘토들이 울었다. 나도 울었다.

졸업식이 끝난 뒤 윤수가 내게 다가와서 어깨를 툭 치며, 아주아주 시건방진 표정으로 딴엔 고마움을 표한답시고 말을 걸었다. "정말정말 못 생긴 우리 최쌤, 고맙습니다."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었다. 대답 대신 녀석이 쳤던 것보다 강도 높은 스매싱을 녀석의 어깨에 날렸다. 순간 녀석이 주먹을 쥐더니 한판 붙어보자는 듯 전투 자세를 취했다. 나도 지지 않았다. 곧바로 한판 붙을 자세를 취했다. 다른 한 녀석이 심판을 자청하고 나섰다.

"자, 오늘 지는 사람이 한턱 크게 내는 거다."

내가 제안했고, 윤수 역시 동의를 표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쏜살같이 내달려 윤수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싸움은 개뿔. 서로 얼싸안았다. 심판 보는 녀석도 달려들어 함께 끌어안았다. 힘껏, 아주 힘껏, 오랫동안 끌어안고 강강술래 하듯 빙글빙글 돌았다. 바보처럼 눈물을 흘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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