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욕망과 희망 사이 [영화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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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 욕망과 희망 사이 [영화와 경제]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4.12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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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로에 아스팔트 타르 냄새가 남아 있는 시골 마을, 슬레이트 지붕 집에 세 들어 살 때 주인집 동생 태식이 삼촌은 형과 싸우다가 농약을 마셨고 얼마 되지 않아 미국으로 떠났다.

2년쯤 지났을까 태식이 삼촌은 세발자전거와 가방 가득 마블만화를 보여주며 귀국했다. 공기총을 들고 참새잡이를 다니던 그는 다시 미국으로 나갔고, 우리 집은 신작로 길가에 핀 사루비아 꽃잎 위에 벌들이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던 마을을 떠나 도시로 갔다.

그땐 다 그랬다. 이곳이 아닌 그곳에 무언가 있을 거라는 헛된 꿈, 기대를 갖고 이곳에서 멀어져갔다.

사람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거나 뒤로 물러나게 하는 힘은 욕망이나 희망으로 불리는데 희망을 욕망과 구별 짓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하나,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all for one, one for all).

개인이 사회 전체의 이해와 자신의 이익을 일치시키는데 주저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정치 지도자와 기업가, 법률가 등이 제시한 비전에 동의했을 때 이루어진다.

사회후생함수를 둘러싼 논쟁도 당연히 변증법적으로 전개된다. 심정적으로 롤스처럼 극빈층의 복지가 개선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 평등주의적 사회후생함수에 동의하기 쉽지만 롤스의 모델은 부수·보조적으로 채택되어야 한다.

사회구성체는 전체가 하나를 위하는 동정심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고 하나가 전체를 위해 스스로의 욕망을 기꺼이 조절하게 하는 보상, 혹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근거로 하는 희망과 함께 보전되고 번성하기 때문이다.

스티브 연이 이미 수입이 보장되는 병아리 감별사 일을 소홀이 하면서 버려져 있는 땅을 개간하는 일에 매달릴 때 은행, 수맥 탐지인, 교포가 운영하는 슈퍼마켓 등과 서로 연관되는 과정을 보면, 벤담식 공리주의의 사회후생함수가 기본이 되어야 함에 동의하게 된다.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또 다른 하나, ‘종자가 되는 큰 과일은 따먹지 않고 남겨둔다’(碩果不食·석과불식).

무수히 반복되고 입증된 가설이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가운데 개체수가 계속 증가되어온 종은 군집생활을 하면서 다음 세대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희생하고 인내할 줄 안다.

정부의 주택가격억제 정책이 소유욕과 투기세력이라는 욕망의 관점에서 편협하게 기획되는 한, 서민들이 주거를 안정시키고 그 기반 아래 아이를 키우거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서 십수 년 간 절약하며 소박하게 살아온 삶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한예리는 시골의 외진 농장에 세워둔 컨테이너 주택에서 벗어나 아이들과 도시로 이전하기 위해서 스스로 병아리 감별사 일을 배운다. 이 능동성을 욕망의 발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윤여정이 침대를 손자에게 양보하고 창문 아래에서 잠을 자다가 풍을 맞는 것은 또 어떤 가? <미나리>는 헐리우드의 전형적인 이민자 영화들(대부 시리즈,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등등)과 다른 면이 있는데, 그것은 이식 불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미나리 속 인물들은 전혀 총을 들지 않고 결국 수평아리처럼 폐기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비백인계의 이민을 허용한 것이 2차 세계대전 직전이었다거나 보호구역 안에 사육되는 인디언, 알래스카의 에스키모 등 미국 내에 가득한 ‘황화’(黃禍)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만들어내는 억압은 삼키기보다는 뱉어내기로 발현되기 쉬운 것이었다.

흑인은 그들의 노예였지만, 인디언들은 운디드니에서 마지막 학살이 벌어지기 전까지 수백 년 동안 그들이 늘 손에 총을 쥐고 있게 만든 방아쇠였기 때문이다.

역사는 해무처럼 우리가 잠자고 있는 사이에 세상을 물들이며 무언가를 사라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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