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부력’, 젊은이를 양지로 밀어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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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부력’, 젊은이를 양지로 밀어올려라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7.13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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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력' 스틸컷.
영화 '부력' 스틸컷.

어느 소년이나 성장한다. 애욕이나 경쟁의 폭풍 속에서도 어렴풋하게나마 타자를 감지한다. 코발트빛 대양의 수면 위로 분투하며 짊어졌던 사명감 따위가 떠오르고 능선에서 삐져나온 소나무 가지엔 들불 같던 풍문을 피해 자유가 매달려 있다.

어느덧 기관사가 되고 항해사가 되고 선장이 되기도 하지만 한번 형성된 시회구성체는 수많은 연기를 끌어들이며 유지된다. 억압적인 구조에 순응할지라도 틈은 시스템 자체, 혹은 구성원 스스로로부터 생긴다.

손자의 손에 이끌려 시골 학교 운동회에 놀러갔던 할머니는 막걸리에 흥이 겨워 소리를 했고 기생이었던 것이 드러나자 푸른 개울에 몸을 던진다.

가뜩이나 분단 상황에서 강화되었던 전체주의적인 습성은 인터넷시대를 만나 오히려 성리학적 윤리의식을 고취시키는 형태로 발휘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감염경로를 파악하듯이 인과율에 대해 과잉된 자신감은 우리 사회를 좀 더 폐쇄적인 사회로 만들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소년이 몇 번인가의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야 살육의 바다에서 벗어났을 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는 것은 그래서 통렬하다. 지눌의 말대로 ‘진흙에 넘어진 자는 그 진흙을 짚고 일어선다.’

이제 인과의 굴레 속으로 뛰어든 소년은 어떤 바다를 건널 것인가? 어떤 산을 오를 것인가?

청년들이 전염병, 전쟁, 인종청소 등의 파국적인 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유학 따위가 아닌 경제적인 포부를 갖고 세계로 뛰쳐나가길 바랄 뿐이다.

또한 아동·청소년에 대한 노동력 착취는 유구하고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여전히 은밀하게 만연되어 있는 문제다.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결국 18세기 산업혁명이 기동된 이래의 참혹함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새우잡이 어선, 염전노예, 실업계고등학교 학생의 실습사업장에서의 저임금, 광화문카페 알바의 시급이 평균보다 낮다든지, 제도 밖이나 제도 안에서 모두 유인과 착취가 구조화되어 있다.

따라서 담뱃갑의 경고 문구(일제는 군함도의 참상을 게시하여 알려야 한다는 유네스코의 권고안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처럼 아동·청소년이 노동력을 착취당할 유인이 상존하는 산업에서는 그 위험성을 항상 공시하여야 한다.

젊은이가 음지가 아닌 양지를 찾아갈 수 있도록 길을 비추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밖의 긴급구조나 삶의 복원은 이미 인생이라는 영역에 들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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