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등’, 가스라이팅과 플러팅의 루프에서 벗어나기 [영화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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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등’, 가스라이팅과 플러팅의 루프에서 벗어나기 [영화와 경제]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3.10.05 0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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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가스등’의 한 장면.
영화 ‘가스등’의 한 장면.

통화신용정책을 총괄하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와 동북아 한·중·일 중앙은행의 역할과 기능은 필연적으로 긴장 관계에 있지만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정책 수단을 구사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기축통화의 발권자라는 것을 감안하고도 뚜렷한 차이를 드러낸다.

연준은 금리를 조정하여 달러패권(환율, 구매력)을 유지하고 기업혁신(자본시장을 통한 솎아내기)을 유도하는데 반해, 동북아 삼국은 고도 성장기를 이미 지나쳐왔음에도 신산업이 아닌 전통적인 주력산업에 매달리면서 요구수익률을 높이지 못하고 있다.

왜 동북아 삼국의 중앙은행은 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재경부나 거대 기업군에 예속된 듯한 포지션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레버리지의 조정자 역할을 방기한 채 인플레이션을 경제성장률의 부산물로 여기고 금융자본을 산업자본의 금고로 치부하는 것은 개발독재 혹은 국가독점자본주의 시대의 잔여물이라고 할 수 있다.

후발주자로서 압축 성장을 위해 불가피했던 국가·산업·금융의 삼위일체라는 구각을 깨뜨리지 못하고 금융과 산업의 길항관계에서 비로소 달성되는 균형을 상실하고 비효율성을 외면하는 것이다.

빅 쇼크 후에 자산시장 특히, 유교적 관료제하에서 길들여진 부동산에 대한 맹신이 붕괴하고 장기적인 경기침체에서 헤어나지 못하거나 장기불황의 입구에 서 있는 중국이나 일본은 여전히 국가, 기업, 은행이 사실상 하나로 얽혀 있다.

다만 한국만이 군사정권 하에서도 가동한 양도소득세제, 민주화 과정에서 도출한 금융실명제를 통해 투명성을 확보하고 자산 가격의 거품을 끊임없이 걷어냈으며, 세계화 이래 비정규직의 본격적인 도입으로 노동시장의 탄력성을 어느 정도 확보하자 효율성은 만개의 기업 모두에게 적용되는 불문율이 되었다.

하지만 금융실명제나 양도소득세제, 비정규직의 만연 등만 갖고는 기업이 자발적으로 혁신을 최상의 가치나 모티브로 삼기 어렵다. 두 개의 유니버스에서 자율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정책기구로서 재경부로부터 한국은행의 독립, 실물시장에서 거대 산업자본으로부터 금융자본의 독립이 그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연준이 금리를 갖고 외환시장과 채권시장에서 벌이는 가스라이팅(긴축발작)과 양적완화라는 플러팅(자산가격의 거품)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나 아렌트의 책 표지에 있는 사진을 보면 잉그리드 버그만이 떠오르곤 했는데 얼마 전 <가스등>을 보면서 이유를 알게 됐다. 아렌트의 겁먹은 얼굴은 나치의 주관적인 정치 프로파간다가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사회에 맞서 소외된 세계의 개별적 인간들이 연대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을 때의 숨죽인 긴장감이 배어있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가스등>의 잉그리드 버그만은 불안한 표정도 희미하다. 남녀 간의 힘의 균형이 깨지고 어느 한쪽이 의도적으로 상대방을 억압하면 강박에서 신경쇠약으로의 폭력적 전회(轉回)가 이루어지는데, 그녀에게는 이를 넘어서 세계를 이탈한 타자의 얼굴, 무심함이 엿보인다.

돌이켜보면 한나 아렌트나 잉그리드 버그만 모두 유럽에서 태어나 2차 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유럽의 바운더리 밖 신대륙으로 튕겨 나간 것이다. 그 상실감은 근원적이다. 20세기 초의 유럽은 사상과 예술 등에서 인류가 도달해보지 않은 영역에 가 있었고 그 정점에서 나치가 출현한 것이다.

근대성을 이성과 같은 말이라고 치부하던 자신감이 유럽 중심의 세계를 구성했는데, 세계에 구멍이 생기자 당혹감이 그들의 얼굴에 가득하다. 서툰 남자의 가스라이팅에는 처음부터 방어기제를 작동시킬 필요도 없었다. 불온한 의도는 편지를 가로채는 순간부터 플러팅에서 가스라이팅으로 전회되기 시작했음을 그녀는 놓친 적이 없었다. 그냥 내버려 두고 몸을 맡겨 연애라는 심연에서 빠져나온다.

플러팅과 사랑을 가르는 것이 신뢰라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환등기 프레임처럼 지나가는 젊은 날의 연애를 모두 유희라고 몰아붙이기엔, 그 시절의 한 움큼을 파먹는 상실을 유희의 대가로 치르기 때문에 낭만이나 죽음충동의 하나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국가 간의 관계에서는 연애나 상실이 없다. 철저한 주고받기 속에 외교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연준이 금리나 양적완화를 갖고 가스라이팅과 플러팅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더라도, 통화당국이 끌려다니지 않고 시기적절하게 과잉 투자한 노후 산업의 요구수익률을 높여 구조조정하고 부동산시장의 거품을 걷어내 노동생산성을 높인 후에, 금리를 낮춰 혁신기업에 자본을 조달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1997년과 2008년을 그렇게 극복해 왔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시험대 위에 서있 다. 우물을 덮지 않고 나눠 쓰는 것은 덕을 쌓는 것이지만, 결단하지 않는다면 우물은 말라버릴 것이다.

ps. 이 글을 쓰고 있을 때쯤 소록도의 마가렛 수녀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름답고 위대한 마가렛 수녀님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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