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전체주의에 맞서다 [영화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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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 전체주의에 맞서다 [영화와 경제]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9.04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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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 /사진=유니버설픽쳐스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 /사진=유니버설픽쳐스

오펜하이머는 연쇄적인 핵분열로 발생하는 에너지를 자원으로 사용할 것인지 혹은 무기로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성찰이 중단된 전쟁 상황에서 태스크포스를 꾸린다. 이후 도덕적 딜레마는 전쟁이 끝나고 트루먼과의 짧은 대화에서 “징징거리는” 몸짓으로 정리된다. 전쟁 당시에 동원되는 국가주의에 맞서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은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플롯은 과학계와 정치계라는 각각의 장(champ)에서 상징자본을 쟁취하기 위한 상징 투쟁이 서로 물리고 물리는 뱀처럼 격렬하게 휘감으며 전개된다.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논의구조를 따라가 보면, 핵물리학의 프로메테우스라는 상징자본을 획득하기 위해, 워싱턴 정가 상징자본의 하나인 상무부장관 지명을 받기 위해 벌이는 상징 투쟁은 전후 미국 사회를 덮쳐 짓눌렀던 매카시즘과 맞물려 장의 자율성을 지켜내기 위한 차원에서도 전개된다.

자율성이 유지되는 장에서의 아비투스에 따른 실천과 자기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의사소통적 행위가 이념적인 담론 상황으로 진입하게 되면, 윤리라는 작은 수레에서 도덕이라는 큰 수레로 옮겨 탈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에 매카시즘이라는 이념적 광기가 더해지면 그야말로 전체주의의 굿판이 벌어지게 된다. 국가 사회의 전체주의적 경향과 조응하며 상동성을 띠던 장의 상징 권력도 공포심에 사로잡혀 기능이 마비되고 마침내 야만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더구나 오펜하이머의 비밀취급 인가의 연장 여부를 심리하는 위원회나 스트로스의 상무부장관 지명을 위한 의회의 청문회는 모두 학문의 장 밖에서 작동하는 것이었음에도, 과학자들은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장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반격을 가한다. 그래서 더욱 통쾌하다.

그것은 마치 선조가 안동의 좌수 자리를 얻어 기뻐하는 유성룡을 보고 한탄하는 것과 같다. 조선 시대 사림의 상징자본 중의 하나인 좌수는 조정의 정승만큼 권위 있고 탐나는 것이었나 보다. 500년 전 사림의 자율성이나 조정과 연동된 상동성 등을 보면, 20세기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나 맨하탄 프로젝트를 위해 구성된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이상으로, 왕의 권위와 맞설 정도의 상징자본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끊임없는 상징 투쟁의 결과였다.

상징 권력을 향한 상징 투쟁을 전 지구적으로 확대해 보면, 산업혁명 이후 200년 가까이 인류는 서유럽이 주도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용인해 왔다. 그 흐름이 바뀐 것은 ‘균형 성장론’과 ‘불균형 성장론’의 오래된 논쟁에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종지부를 찍으면서부터이다.

불가피한 ‘축적의 시간’을 압축해서 산업과 자본을 육성하자 문화적 잠재성을 갖추고 있던 한국 시민사회는 민주주의도 형식적으로 구현해 내며, 아시아의 다른 기러기들(타이완·싱가포르·홍콩·말레이시아, 세계화 이후엔 중국·베트남·인도네시아 등)이 따라서 날아오르게 만들었다.

이로써 동아시아는 서유럽과 의미 있는 경쟁을 다툴 수 있을 정도의 물적 기반을 갖추었고 알랭 바디우나 지그문트 바우만 같이 20세기를 반추하는 유럽의 지식인들은 아쉬움과 소회를 끝내 감추지 못한다. 20세기 초반 출현했던 조이스의 <율리시즈>나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정도의 문학작품을 그들은 다시 지어낼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더는 충분히 부유하지도, 충분히 여유롭지도, 충분히 자유롭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유럽이 생산력과 인구(즉, 경제성장률) 측면에서는 동아시아에 밀릴지라도 그들에게는 200년 이상 축적된 자본과 군사력이 창고에 가득하다. 20세기 냉전이 이데올로기적 담론 투쟁이었다면 21세기 신냉전은 문명충돌이기 때문에 서유럽은 결국 창고에서 무기를 꺼내 들 것이다.

미국은 다시 한번 다른 대륙에서의 세계대전으로 국한함으로써 패권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바다 건너 미국 본토까지 전쟁의 포연에 휘말려 들어갈지는, 보든이 오펜하이머에게 묘사했던, “히틀러의 V2로케트가 유성처럼 날아가는 것을 봤다”라는 장면이 암시하듯 핵미사일과 핵잠수함이라는 투발 수단이 결정할 것이다.

또한 오펜하이머의 바람대로 인류는 냉전이 종식되기 전에 핵 군비 감축을 시작했고, 유엔과 NPT(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핵확산방지조약)를 통해서 핵무기 확산을 효과적으로 억제해 왔다. 그리고 양패구상의 핵 억지력은 정석이 되어 인류는 핵우산 밖 대리전과 무역과 금융 등 제한된 경제전쟁만을 수행할 뿐이었다.

돌이켜 보면, 중국이 세계제패에는 뜻이 없고 아시아에서의 지배력만은 갖고 싶어 한다는 키신저의 진단에 의아해했던, 우리의 의심이 놓친 것은 중국이 보유한 핵탄두 숫자이다. 미국과 옛 소련이 자국과 위성국 혹은 동맹국에 배치해 놓았던 핵탄두는 중국의 3배 가까이 된다. 하지만 중국이 이 숫자를 급속히 늘리거나 주변 아세안 등 국가에 핵무기를 이전하면 그때야말로 중국이 패권국가로서의 야심을 드러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또한 80년대 중반 가동했던 몬주(文殊·일본의 실험용 고속 원자로) 프로젝트가 실패해도, 파괴적인 동북부 지진에도 절대 원전을 포기하지 않던 일본은 중국을 핑계 삼아 핵무장을 시도할 것이다. 이때가 되면, 우리는 북의 핵 개발을 멀뚱멀뚱 쳐다보며 경제적 성공과 바터(barter) 해야 했던 과거의 경험을 묻어버리고 핵보유의 시계를 일본의 핵무장에 1초 이상 앞설 수 있게 맞춰야 할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핵이라는 상징자본을 둘러싼 상징 투쟁은 곳곳에 숨어있다. 핵탄두 마초에 맞서는 것은 핵우산 아래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다. 물론 그전에 우리는 21세기 초반에 누렸던 평화와 번영의 근원을 두려운 마음으로 되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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