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의 연인’, 접시를 깨뜨리지 않는 법 [영화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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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연인’, 접시를 깨뜨리지 않는 법 [영화와 경제]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1.05 0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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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만인의 연인’의 한 장면. /사진=시네마달
영화 ‘만인의 연인’의 한 장면. /사진=시네마달

오래전 대학원 수업을 듣고 있을 때 도서관에는 ‘만대일’이라고 추앙을 받던 여학생과 ‘더원(THE ONE)’이라고 불리며 풍문에 휩싸인 또 다른 여학생이 있었다.

만대일이라고 대상화됐던 이유는 그 학생이 도서관에서 자리를 비우면 늘 수북이 쪽지가 쌓였고, 대부분 남학생이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 더원으로 타자화되었던 여학생 얘기는 지금 들으면 기함할 만한 것이었는데, 그녀가 도서관 휴게실 흡연 칸에서 같은 별칭의 담배를 피우다 예비역 복학생한테 뺨을 맞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학기가 끝날 때까지 THE ONE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흡연 칸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학생들이 점점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만대일이든 더원이든 미숙함이 부풀리는 호기심과 야상(야전 상의)을 걸쳐 입은 예비역들의 보상심리를 축으로 자전시키는 뒷담화는 담배 연기처럼 부질없이 사라졌다.

영화 ‘만인의 연인’에 나오는 인물들은 주체와 대상, 타자로 이루어진 삼각관계 속에서 각각 만인의 연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열여덟 살 현욱은 풍문에 대한 책임을 지고 도덕적 딜레마를 통과해 타자의 위치에 기입한다.

‘만인의 연인’은 성적인 대상이든 타자이든 그 굴레를 벗어던지고 주체로서의 자리를 찾아가는 열여덟 또래 유진의 이야기다. 유진은 강요에 굴복하지 않고 난감한 상황에서도 진실을 말한다.

그녀가 끝까지 접시를 깨뜨리지 않고 다 받아내며 욕망의 주체임을 선언하거나 삶의 경로를 횡단하며 세상을 설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2023년 경제에 깃든 어둠, 헤지펀드의 공격대상이 되거나 글로벌 자본자산 시장에서 아웃라이어가 되거나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계는 지금 얼룩말들이 헤지펀드 혹은 급격한 신용경색이라는 맹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형국이다. 그 얼룩말 중에는 중남미의 여러 국가, 일대일로의 채무국들, 브렉시트한 영국, 중국, 일본, 한국 등이 있고 심지어는 미국조차 고립되어 하이에나들에게 먹힐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먼저, 중국이나 일본 등 미국의 금리인상 드라이브를 못 쫓아가고 딜레마에 빠진 나라들 위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은 미국과의 금리 역전을 허용하기 직전 금리를 동결하고 코로나 봉쇄를 해제하는 등 시진핑 집권 3기의 출발을 유연하게 시작한 듯 보이지만, 여전히 부동산 개발업자와 일대일로 채무국의 디폴트로 인한 금융위기 가능성을 안고 있다. 러시아든 인도·이슬람 벨트든 유럽에 맞닿는 교역시스템을 구축해서 미국의 포위망에 대응하지 않는 한, 방화벽처럼 기능하는 그들의 낙후된 금융시스템도 헤지펀드의 공격에 뚫리고 말 것이라는 예측이 설득력을 가진다. 홍콩 반환기처럼 백지시위 기간 중에 중국의 자본가들이 싱가포르 등에 거점을 확보하고 있다는 보도를 보면 말이다.

최근 일본이 보여준 액션, ‘YCC’(Yield Curve Control) 상의 10년물 장기 국채의 수익률을 인상한 것과 보유하고 있던 미국 국채를 1000억달러 이상 매각하고 엔화 방어에 나섰던 것은 두 가지 방향의 자본흐름을 예상케 한다. 그동안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해온 일본에서 흘러나와 전 세계를 유랑하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엔캐리 자금들이 일본으로 회귀할 것이라는 것과, 이자비용 등의 증가로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자본가들이 그동안 보유하고 있던 일본은행 발행 국채를 매각하며 오히려 해외로 이탈할 것이라는 전망 모두 작동하고 있다.

또한 미국은 기축통화국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모든 경쟁자를 궁지에 몰아넣었지만, 최근 일본과 중국이 보조를 맞추듯이 미국 연방준비은행 발행 국채를 대량 매각하며 옐런 재무부 장관을 얼어붙게 한 경우를 보면, 궁지에 몰린 하이에나들이 뭉쳐 미국이라는 사자에 맞선다면 미국의 금융시스템 또한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처럼 격랑에 휩쓸릴 여지가 생긴 것이다.

대초원 위에 얼룩말 떼가 사자에게 쫓기고 있다. 그 주변에는 하이에나 무리가 낙오된 새끼 얼룩말들을 노리고 있다. 사냥에 몰입한 사자가 무리와 동떨어져 하이에나 무리에 둘러싸인다면 사자 또한 물어뜯길 것이다.

우리는 외환위기의 구성요건(장기간의 무역수지 적자+기축통화국과의 금리 역전+환율급등)과 금융위기의 구성요건(신용경색+법원경매 급증+사실상의 뱅크런)을 체크하며 시장 간의 밸런스를 유지하고 외부에는 우리 뒤에 많은 얼룩말이 있다는 신호를 보내야 한다.

‘만인의 연인’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열여덟 살 유진과 한 살 많은 혜선의 캐치볼 장면이다. 언뜻 보면, 그들 사이에 있던 점장 때문에 싸우고 있어야 했다. 이미 혜선과 동거하고 있던 점장은 어린 알바생들에게 관대하고 친절하지만,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친밀함은 묘한 경계선 위에 있었다.

유진과 혜선은 볼을 주고받으며 연애 감정, 시기심, 궁핍함 너머에 있는 사태의 핵심을 놓치지 않고 동조할 뿐, 불현듯 날아온 돌멩이에 놀라지 않고 섣부른 인과율에 주눅 들지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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