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명주공’, 자유의지와 세계화는 금단의 열매인가? [영화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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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명주공’, 자유의지와 세계화는 금단의 열매인가? [영화와 경제]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2.10.0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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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봉명주공’의 한 장면. /사진=시네마달
영화 ‘봉명주공’의 한 장면. /사진=시네마달

교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다니던 시절 무심천 뚝방 옆 연립주택에 살고 있었다. 여름철엔 건물 외벽에 비치는 가로등 불빛을 조명 삼아 노래자랑 대회가 열렸고, 김장철엔 1층 발코니 앞마당에 김장독을 묻었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 연립주택은 여전히 재건축조합을 결성하지 못했고 페인트칠은 퇴색하고 벗겨져 있다.

영화 <봉명주공>은 소멸하는 아파트 마을 공동체의 운명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입주할 때 태어난 아이들은 이미 다 커서 떠나갔고 노인들만 남아있다. 목련과 버드나무는 무성하고 치렁치렁하다.

유럽의 오래된 관광지들에서 느껴지는 애잔함과 비슷하다. 2차대전 이후 산업경쟁력을 상실하고 금융이나 관광 등의 서비스산업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유럽의 옛 제국주의 국가들이 60년 가까이 유지 보수하고 다듬었을 주황색 지붕에는 마치 휴거를 기다리는 것 같은 절박함이 투영되어 있다.

기업지배구조는 도메스틱 안에서 관료나 시장과의 ‘길항’ 관계에 적응하면서 형성되지만, 핵심 목표는 소비자주권이나 반독점법률 등의 규제에서 벗어나 의사결정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었고 이는 민주주의 물적 기반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세계화는 기업지배구조의 전 지구적 확장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미·중 간의 패권 다툼이 세계화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더라도 다국적기업과 투기자본은 세계화의 과실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소련이 자본가의 존재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외면하다가 해체되었듯이, 미국 또한 세계화의 억지 요인으로 작동하다가 패권국가로서의 비교우위를 상실할 수도 있는 대혼돈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봉명주공’의 곳곳에 심어진 나무들은 이 마을 이 아파트 단지가 얼마나 오래됐는지를 상기시켜 준다. 목련 나뭇가지가 이삿짐 차량의 진입을 가로막아 가지를 잘라내는 모습에서 사실은 나무와 주민들과 아파트 건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계화는 인터넷에 의해 실시간으로 통합된 자본시장 혹은 ‘지구적 공급망’(Gloval Value Chain) 등에 의해 인류가 이미 ‘초연결사회’(Hyper-connected Society)로 진입하였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이 그 초연결사회의 회로를 파괴하려는 것인지, 방해물을 제거하려는 것인지 머지않아 판명 나겠지만, 국제사회는 냉정하게 힘의 논리, 즉 다국적기업과 투기자본의 이해를 일관되게 관철해 왔다.

아파트가 마을 공동체의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삭제하기 시작한 것은 유럽의 오래된 항구도시에서 볼 수 있는 부둣가 주변의 밀집된 공동주택 수준을 넘어서, 표준화된 평형과 모델이 대규모로 공급되면서 환가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가격협상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아파트는 고유하고 개별적인 역사가 깃든 주택이 아니라 골드바에 더 가까워진 것이다.

‘봉명주공’의 나무들은 대부분 전기톱으로 베어지지만, 몇 그루 나무와 관목은 다른 곳으로 옮겨 심어진다. 그곳에서 ‘봉명주공’의 역사는 뿌리를 타고 또 다른 나무와 꽃들로 전해지리라.

자유의지와 세계화는 인류의 오래된 숙명, 전쟁에서 벗어나는 길처럼 여겨져 왔고 실제로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운명의 날 시계’는 멈춘 듯이 보였지만, 어느덧 푸틴이 핵 단추를 눌렀다는 소식이 들려와도 놀랍지 않은 세상이 되고 말았다.

망각의 강을 건너는 것은 청년들의 조급함일까, 아니면 노인들의 상실감일까? 의심이 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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