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일리 블루스’, 마하티르 총리 차량번호는 아직도 ‘2020’일까 [영화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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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리 블루스’, 마하티르 총리 차량번호는 아직도 ‘2020’일까 [영화와 경제]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7.06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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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카일리 블루스’의 한 장면. /사진=찬란
영화 ‘카일리 블루스’의 한 장면. /사진=찬란

오래전 종로에 있는 회계학원에서 <경제학연습>을 듣고 있을 때, 강사 선생은 마하티르 빈 모하맛 말레이시아 총리의 관용차량 번호가 ‘2020’이라고 알려주면서 콘드라티예프 파동을 설명하고 있었다.

마하티르는 콘드라티예프 파동 이론에 따라 경기가 새롭게 요동치는 2020년까지 한국을 추월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차량번호를 정했다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아시아에서 유례없는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로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구현하고 그 활력으로 세계화의 물결에 올라타고 있을 때라, 마하티르의 호기는 쉽게 잊혔다.

그런데 며칠 전 말레이시아의 국가경쟁력이 우리보다 높은 순위에 있다는 보도를 접하고 경제학연습의 경기변동론 장을 다시 펼쳐보았다. 98세의 마하티르는 여전히 국제정세에 있어서는 미국에 비판적이면서도 “모두가 평등하길 바란다면, 모두가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개개인의 능력은 다르고 능력에 따라 보상받을 때 사람들은 더욱더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게 내가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중에서 자본주의를 택한 이유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수많은 반문이 일어나겠지만, 최근 동아시아 주요 3국 한국, 중국, 일본 모두가 경제활력을 잃고 서유럽처럼 맛집에서 줄이나 서면서 잠재성장률을 갉아먹는 인구감소와 후대를 위한 자본축적과 연구개발 대신 탐욕적인 카지노 자본주의에 몰두해 있는 상황에 무언가 다른 함의를 주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영화 <카일리 블루스>는 2015년 예민한 젊은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 바야흐로 중국이 G2 반열에 올라서며 중국몽이나 굴기를 굳이 20년 후로 미룰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기 직전이다. 문화는 자본의 전위가 될 수밖에 없다. 주가보다 빨리 달아오르고 먼저 식어버린다. 그는 미국과의 패권 다툼에서 노출됐듯이 지방정부의 난개발로 피폐해진 중국 변방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유럽이나 동아시아 여러 나라는 마치 냉전 초기로 돌아간 듯이 조급하게 전진 나팔을 불어대고 있다. 하지만 냉전 이데올로기는 오래전 아비튀스의 범주에 들어가 퇴역식을 치렀기 때문에 지금의 소동은 유사 이데올로기 대립에 불과하다.

물론 전체주의적 문화기반을 가진 동아시아에서는 마오쩌둥 시절의 대약진운동이나 군사정권 시절의 공안정국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없지 않고 일본은 다른 측면, 냉전의 최대 수혜자로서 30년 경제불황을 탈출할 절호의 기회라고 들떠 있겠지만 결국, 자본과 시장의 역동성 아래 포말처럼 흩어질 것이다.

향후 20년간 인류 최대의 과제는 미·중 간의 패권 다툼에서도 냉전과 마찬가지로 핵 억지력이 작동한다는 전제하에서 우크라이나처럼 대리전쟁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는 것인데, 유럽은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가 ‘이번엔 그만’을 외치며 유럽 역내에서의 국제전을 차단하는 것에 동의하고 있지만, 아시아는 일본을 비롯해 인도, 푸틴 이후의 러시아까지 제한된 국제전을 용인하거나 바라는 세력이 적지 않다. 그리고 시장은 그러한 지정학적 리스크를 조정하며 격렬하게 움직일 것이다.

<카일리 블루스>는 유려하다. 이미 한국식 고층아파트가 들어선 카일리는 문화혁명에 상처받거나 고도 경제성장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들고양이처럼 숨어있다. 역사가 시장에 잠식되는 순간 의식은 시뮬라크르 자전이나 상징적인 완곡화에 누빔질당하고 상징체계는 더 이상 주체의 도전에 반응하지 않고 결락된다.

천성이 어찌하지 못하고 전위안으로 흘러가는 길에는 마치 탄광촌의 공동주택이나 카지노 주변의 숙박시설 같이 콘크리트 건물이 계곡 옆에 덕지덕지 붙어있다. 카메라의 시선이 쫓는 사람과 풍경들은 꾸며지거나 감춰지지 않았고 생생하게 드러난 삶과 배경들은 언어의 치장이나 수사를 건너뛰어 관념적인 시편들과 조응할 뿐이다.

전위안에 도착하기 직전 어느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시간이 뒤섞이거나 중첩되어 있는 환각에 빠져들게 한다. 마치 정선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고개를 넘어갈 때 다른 시간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처럼, 혹은 죠이스의 <율리시즈>에서 블룸이 시공을 넘나들며 더블린 시내를 가로지르듯이.

천성의 오딧세이는 전위안에서 카일리로 회귀하는 열차 안에서, ‘지금 이곳에서’라는 다소 익숙하지만, 파국에 징후를 견뎌낼 수 있는 모토로 귀결되며 끝난다. 오딧세이의 목적이 시간을 반추해서 삶을 재구성하고 새롭게 인식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 환각과 환기 사이 어디쯤에서 멈추고 만다. 의식이 언어와 이미지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역사는 의식 밖에 실재하기 때문이다.

의식을 ‘식역하 지각’(識閾下知覺)으로 내려보내 언어도단(言語道斷)으로 만들지라도 욕망이라는 나침반을 따라가면 결국 폭발하는 순간을 만날 수 있지만, <카일리 블루스>에서는 이어달리기하듯이 연결되는 행동과 오토바이나 밴을 따라오는 자연풍광들이 시편들에 의해 조여지고 배열된다. 의식이 이미지에 포착되어 ‘입상진의’(立象盡意) 하더라도 이미지가 세계에 공명하고 부서지면, 소외와 가족애를 둘러싼 불안이 화면에 흩어져 스며든다.

말레이시아는 소외에 대한 노동의 가장 소극적인 저항인 소멸 즉, 노동인구의 감소를 어떻게 극복하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들도 단지 늦게 도착하고 있을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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