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카라스의 여름’, 전환기 농업과 독재자 종말시대 [영화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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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라스의 여름’, 전환기 농업과 독재자 종말시대 [영화와 경제]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3.06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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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알카라스의 여름’의 한 장면. /사진=㈜영화사 진진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의 한 장면. /사진=㈜영화사 진진

시골 농협에 다니는 오랜 친구가 농협에서 직영하는 김치공장을 관리한 적이 있는데, 김치공장에 다니는 아주머니들의 푸념 속에서 ‘다시는 밭일을 하고 싶지 않다’라는 속내가 보였다고 얘기했다.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에는 소멸을 눈앞에 둔 농장과 그 가족의 소박한 저항, 귀엽기까지 한 몽니가 담겨있다. 각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복숭아밭과 토마토, 무화과나무에 둘러싸인 농가와 떨어지기 싫어서 의기소침해하고 화내고 울지만, 포클레인이 그르렁거리며 나타나 복숭아나무들을 쓰러뜨린다. 농업은 막 내린 산업일까?

스페인은 농업국가다. 스페인 내란 이후 40여년 가까이 철권 통치해온 프랑코 총통이 권좌를 내놓고 국립묘지에 묻히기까지 독재정권의 전형처럼 문화 지체와 경제 지체를 방치해온 결과, 산업의 공동화 속에 축구나 유적지 등의 관광 서비스 산업이나 농업으로 연명해 왔다. 2019년쯤인가 스페인 최고법원은 프랑코의 무덤을 국립묘지(‘죽은 자들의 계곡’ 내 ‘그랜드 마우솔레움’)에서 들어내는 판결을 했다.

20세기 냉전 속에서 우후죽순 출몰했던 독재자들은 냉전의 종식과 함께 길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오바마 집권기에는 세계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박탈감이나 개발독재의 정점에서 분출하는 애국주의를 등에 업고 준강형 독재자들이 나타났다.

푸틴, 시진핑, 아베, 에르도안, 보우소나루, 두테르테, 트럼프에 이르기까지 언론과 법원 등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권위주의 정권을 형성했던 이들이 최근 2~3년 갑자기 사라지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바야흐로 미·중이 패를 감추지 않고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는 마당에 무슨 힘이 작동해서 이들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일까? 세계화의 퇴조가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판짜기가 이미 시작됐고 판들이 움직이면서 응력이 쌓이는 것이다. 에르도안은 물리적으로 현실화한 지진으로 위기에 처했고, 푸틴 또한 2023년이 다 가기 전에 그의 조국에서 축출될 것이다.

이들 독재는 세계화가 가져온 화폐유통속도의 폭증과 주요 통화국들의 사실상 제로금리정책 등으로 벌려진 신용 승수의 확대에 의존하는 포퓰리즘에 브레이크가 걸리는 순간 넘어진 것이다.

그들이 획득했던 상징 권력은 부르디외가 말하는 ‘상징적인 완곡화’(symbolic smoothing, 예; 이자소득은 불로소득이기 때문에 금리를 높이면 안 된다, 엔화는 기축통화다, 부동산경기가 시장 전체를 떠받친다 등등)를 통해서 좀 더 쉽게 구축되고 작동하는데, 이것이 한계에 도달하면 붕괴하는 것이다.

결국 에르도안은 금리를 계속 인하하다 100%가 넘는 초인플레이션을 초래했고, 엔화를 기축통화라고 강변하던 아베는 양적완화를 적정하게 되감지 못한 채 장기불황의 기록을 10년 이상 늘려놨고, 시진핑은 3기 연임에 성공하고도 지급준비율을 낮추겠다고 가볍게 말함으로써 미국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뜻 보면 권위주의 정권의 일사불란함이 효율적으로 보이겠지만 역사는 다원주의의 자발성이 더욱 강력함을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미국 재무부와 국방부, 상무부, 국무부가 번갈아 가며 다른 경로와 과정을 거쳐 중국을 견제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분열된 주체가 아니라 마치 손오공이 분신술을 부리듯이, 월인천강(月印千江) 하듯이 현란하다.

하지만 시진핑의 즉각적인 의사결정에 동원되는 300통의 빨간 전화는 상징 권력의 또 다른 상징적인 완곡화이고 자발적 복종을 불러온다. 자발적 참여와 자발적 복종의 변증법적 관계는 20세기 냉전 이데올로기가 이미 아비투스의 범주에 들어온 지금, 유사 이데올로기 대립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 연준은 겉으로 보기에는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서 금리 인상 드라이브를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코로나 봉쇄를 해제한 중국이 방역 문제를 혼란 없이 수습하자, 부실 회계가 만연할 것이라고 예단하고 있는 중국 금융시장을 정조준하기 위해서 기준금리를 5% 이상으로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지각변동의 응력은 금리를 인하할 요인이 많은 쪽에 작용할 것이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재무적 작란(作亂)이 아닌 군사적 옵션을 선택하는 쪽이 패권을 잃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미 연준은 중국 금융시장이 붕괴하거나 혹은 미국 채권시장이 붕괴하거나 할 때까지 5% 전후의 기준금리를 끌고 갈 것이다.

<알카라스의 여름>에는 쉽게 공감하게 되는 흥미로운 장면이 많은데, 가장인 키메트가 지게차를 몰다가 갑자기 울먹이는 모습을 지켜보던 남매의 표정이 심각해지고, 지주의 집을 찾아가 죽은 토끼를 던져놓고 오는 장면이 그렇다.

영화 보는 내내 반목하던 아버지와 아이들은 이렇게 화해하고 농장을 지주에게 내주는 한편, 황도 복숭아 통조림을 만든다. 오래된 내 친구의 어머니는 예전에는 두부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파셨다고 한다. 또한 태양광발전에 대한 논쟁에 극히 제한적인 대안이겠지만, 축산농가에서는 축사 지붕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함으로써 일석이조의 효과인 경우도 있다. ‘순수한 농부의 시대’는 끝났지만 1차 가공이나 판매를 겸영하는 농부들은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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