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주식시장이 온통 시뻘겋게 불이 붙은 형국이다. 코스피 지수는 웬만한 악재에는 끄떡도 없이 힘차게 위로 치솟는 모양새다. 지난해 말 2399.49P에서 마감한 지수는 어느새 3823.84P까지 치솟았다. 꿈결에서나 구경할 줄 알았던 4000포인트 시대가 곧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말 대비 코스피 지수 상승률은 어느덧 59.0%를 기록 중이다. 주가지수 연봉 그래프만 보더라도 올해 상승 폭이 얼마만큼 대단한 것인지 금세 알아볼 수 있다. 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노라면, 예전에 한때나마 증시를 불태웠던 역사적인 강세장들이 그저 스쳐가는 반짝 장세처럼 여겨질 정도다.
증시가 상승하면 투자자들의 마음도 덩달아 부풀게 마련이다. 이럴 때 한몫 단단히 잡기 위해 마통을 끌어쓰고, 증권회사로부터 신용 융자를 받아 상승세에 베팅한다. 과거에 펼쳐졌던 그 어떤 강세장이든 신용잔액이 동반 상승하지 않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신용 팽창은 필연적으로 '강제 청산'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언젠가는 강세장이 끝나고, 기록적인 폭락장이 예고 없이 닥치면 담보 가치가 급격하게 줄면서 증권사에서 빌려준 신용융자금이 강제로 회수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신용잔액은 23조5486억원으로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4년 전 동학 개미 열풍이 불었을 때 기록했던 25조2208억원에 조금 못 미치는 금액이다. 현재의 신용융자 잔액은 4년 전 고점 당시보다 훨씬 크게 불어난 시가총액(약 3539조원) 덕분에 시총 대비 신용잔액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은 0.7% 수준에 머물러 있다. 주가 상승 속도를 신용잔액 증가 속도가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다. 달리 생각하면, 개인투자자들의 국내 증시에 대한 참여 열기가 예전만큼 뜨겁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지나간 수많은 사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레버리지 강제 청산은 언제나 예고 없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시가총액이 커진 만큼 신용융자 잔액이 지금보다 몇 조원씩이나 추가로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예전보다는 덜 위험하다는 논리는 결코 성립할 수 없다.
한국 증시에서 기록적인 신용 강제 청산 사례는 2005년 이후로 대략 세 차례 있었다. 리먼 사태로 촉발된 금융위기 당시에는 코스피가 36.7% 하락하는 동안 신용잔액은 무려 84.5%나 청산된 사례가 있다. 금액으로는 대략 6조원에 가까운 금액이 청산됐다. 두 번째 기록적인 신용잔액 청산은 코로나19 사태 때 발생했다. 코스피가 30.9% 하락하는 동안 신용잔액은 정확히 절반이 감소했다. 이때 강제 청산된 금액도 6조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세 번째 강제 청산은 불과 10개월 전쯤에 발생했다. 지난해 12월 3일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느닷없이 터져 나온 비상계엄 때문에 원화 가치가 폭락하고, 야간에도 쉬지 않고 거래되는 암호화폐 시장은 그야말로 폭포수처럼 급락했으며,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신용잔액이 청산되는 아픔을 겪었다. 코스피가 2021년 고점 대비 20.6% 하락하는 동안 신용잔액은 무려 40.8%나 감소했다. 신용잔액 청산 규모는 무려 10조원이 넘었다.
신용잔액에 관한 디테일한 통계자료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거래소 정보데이터시스템이나 금융투자협회 종합통계서비스에서도 체계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종목별 신용잔액에 대한 개략적인 윤곽이라도 살펴보기 위해서는 증권사 HTS에서 제공하는 종목별 신용잔액을 일일이 뒤져보는 수밖에 없다. 전 종목에 대해 전수조사할 필요까지는 없을 듯해서, 코스피·코스닥 양대 시장 시가총액 상위 100종목을 각각 표본으로 삼아 총 200종목에 대한 신용잔액을 수작업으로 조사한 결과는 아래와 같다.
코스피 시총 1위부터 100위까지 합산 시총은 약 2650조원이며, 이들 종목에 대한 신용잔액은 9조6767억원이다. 시총 대비로는 0.4%의 신용잔액이 있는 셈이다. 코스닥 시총 100위까지 합산 시총은 약 231조원이며, 이들 종목에 대한 신용잔액은 약 4조원쯤이다. 시총 대비로는 1.8%이며, 비율로만 따지면 코스피 대비 4배 이상 신용잔액이 많은 셈이다.
코스피 신용잔액 상위 10종목에 대한 신용잔액 합산금액은 4조6707억원이다. 코스피 총 신용잔액(14조1697억원) 대비 33.0% 비중이다. 코스피 전체 신용잔액의 3분의 1이 시총 상위 100종목에 집중된 셈인데, 시장 평균 수익률 대비 높은 주가 상승률을 구가하는 종목과 시장 평균 수익률에 비해 현저히 부진한 종목들이 각각 절반씩 섞여 있는 모습이다. 제약업종의 부진한 흐름은 여기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코스닥 신용잔액 상위 10종목에 대한 산용 잔액 합산은 1조7245억원이다. 코스닥 전체 신용잔액(9조3789억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4%에 불과하다. 코스피 신용잔액 상위 10종목에 비해 집중도가 훨씬 덜한 셈이다. 코스닥에 소속된 종목들의 신용잔액이 종목별로 훨씬 광범위하게 분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코스닥 신용잔액 상위 10종목의 수익률은 단 두 종목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대체로 시장 평균 수익률보다 양호하다. 코스닥 벤치마크 수익률이 낮은 영향도 있다. 시장이 전반적으로 강세장 분위기여서 종목별로 높은 신용잔액이 쌓여 있어도 아직까지는 특별한 핸디캡으로 작용하지 않는 듯하다.
현재의 신용잔액은 역대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이지만, 시가총액이 불어나는 속도만큼 급팽창하는 모습은 아니다. 개인투자자들이 올해 들어서만 무려 19조3642억원을 순매도한 터이니, 굳이 신용잔액을 급격하게 늘려가며 주식을 매수할 필요조차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신용까지 동원하여 사들인 종목들의 수익률이 예상보다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때문일 수도 있다. 금융기관이 기꺼이 신용융자를 제공하는 건 언제나 맑은 날씨에 우산을 빌려주는 속성을 지닌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폭풍우가 몰아치면 우산을 빌려 쓴 사람은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하고 우산을 빼앗긴다.
재산은 호황기에 만들어지며, 개인들은 부의 증식 과정에 끼어들기 위한 탐욕에 빠지고, 사기범들이 이 탐욕을 이용하려고 등장한다. 호황기에는 스스로 제 털을 깎이려고 줄지어 서 있는 양의 숫자가 늘어나고, 자신들을 사기범의 희생물로 제공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한다. "일 분마다 한 명씩 속아 넘어간다." -찰스 P. 킨들버거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