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풍제지와 카카오 사태로 되돌아본 ‘행복과 불행’ [오인경의 그·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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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제지와 카카오 사태로 되돌아본 ‘행복과 불행’ [오인경의 그·말·이]
  • 오인경 후마니타스 이코노미스트
  • 승인 2023.10.25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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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미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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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웃들보다 낫다고 느낄 때 행복하고, 그들보다 못하다고 느낄 때 불행하다. <악마의 사전>을 쓴 앰브로즈 비어스는 행복을 ‘타인의 불행을 생각할 때 생겨나는 흡족한 기분’으로 풀이한다. 이디시 속담에도 이와 유사한 말이 있다. ‘곱사등이가 즐거워할 때는 언제인가? 다른 사람의 등에서 더 큰 혹을 보았을 때다’.

​영풍제지의 돌연한 추락을 보면서 양가감정을 느끼는 투자자들이 많을 듯하다. 영풍제지는 어쩌면 올해 잇따라 터져 나온 대규모 주가 조작 사건의 대미를 장식하는 종목일지도 모른다. 지난해 7월만 하더라도 영풍제지의 주가는 2895원에 머물렀고, 당시 시가총액은 1494억원에 불과했다. 급격한 실적 변화를 기대하기 힘든 제지업종의 주식이 불과 13개월 만에 5만600원까지 치솟았고, 시가총액은 최대 2조3520억원까지 불어났다. 시가총액 순위는 3년 전 저점일 때 1373위였다가 최고치를 기록한 올해 8월에는 135위까지 수직으로 상승했다. 시총 순위만 3년 동안에 무려 1238계단이나 뛰어올랐으니, 과연 ‘천국의 계단’을 밟는 주식으로 비유될 만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주가 이상 급등 현상'을 오래도록 지켜봐 왔던 많은 투자자는 영풍제지를 보유한 투자자들을 부러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지켜봤을 게 틀림없다. 영풍제지의 끔찍한 파국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누구나 체감하고 있었겠지만, 그 시점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올해 4월과 6월에 잇따라 터져 나온 초대형 주가 조작 사건들을 접한 뒤에도 이토록 가파른 주가 상승세가 지속되었으니, 투자자들이 느껴왔던 당혹감과 금융 감독 당국을 향한 불신감은 더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픽=오인경
/그래픽=오인경

영풍제지는 한동안 적은 거래량으로도 주가가 꾸준히 올랐다. 라덕연발 주가 폭락 사태뿐 아니라 만호제강 등 5종목 동시 하한가 사태와 주가 조작 수법이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도 금융감독 당국은 유사한 수법을 동원한 영풍제지의 주가 조작 범죄를 제때 적발하지 못해 투자자들의 피해를 키웠다. 영풍제지는 무슨 까닭인지 올해 7월부터 거래대금까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노골적인 대규모의 주가 조작 거래가 매일 수천억원 반복됐다. 2020∼2022년만 하더라도 매월 1000억원 안팎이던 거래대금이 올해 7월부터 갑자기 매월 조원 단위씩 거래되기 시작한 것이다. ​

주가 움직임이 비정상적이라고 판단한 여러 증권사는 이미 연초부터 신용융자를 제한하거나 증거금률을 100%로 서둘러 상향 조정했다. 유일한 예외가 있었다면 키움증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 120일간 거래량을 조사해 보니 매수 거래량의 78.2%는 키움증권의 몫이었다(키움증권 매수량 2억5097만3263주 / 총거래량 3억2105만2473주). 매도 거래량에서 키움증권이 차지하는 몫은 75.4%였다. 주가 조작 세력이 타사 대비 현저히 낮은 증거금률 40%를 적용하는 키움증권을 주된 주가 조작 통로로 이용했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영풍제지의 공공연하고도 대담한 주가 조작 행태는 앞서 적발된 두 차례의 대규모 주가 조작 사건 못지않게 심각하다. 라덕연발 주가 조작 사건에서는 장기간에 걸쳐 꾸준히 상승했던 8개 종목이 갑작스레 집단으로 연속 하한가 사태가 벌어진 데다가, 그런 사태가 진행되는 동안에 사회 각계각층의 고액 자산가들이 '주가 조작 사건'에 적극적으로 편승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더군다나 주가 폭락 직전에 서울도시가스와 키움증권의 회장들이 수백억원대의 주식을 미리 내다 팔았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이번 영풍제지 주가 조작 사건도 그 여파가 쉽게 가라앉지 않을 듯하다. 지난 19일 거래정지 조치 바로 다음 날 발표된 공시내용만 해도 그렇다. 키움증권에서 역대급 미수금(4943억원)이 발생했다고 공시한 것이다. 거래 정지된 영풍제지 시가총액의 31.4%에 달하는 금액이다. 영풍제지의 경우 대주주까지도 이번 주가 조작 사건에 연루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영풍제지는 언제 거래가 재개될지는 물론 장차 상장기업으로서의 적격성 여부까지 문제가 될 수 있다. 키움증권에서 떠안은 대규모의 미수금이 얼마만큼이나 회수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한 셈이다.

지난 주말에 터져 나온 또 다른 증시 악재는 카카오의 설립자 김범수 의장에 대한 금융감독원 특사경의 소환 통보 소식이었다. 계열사만 무려 140여 개에 달할 정도로 문어발식 확장을 거듭해온 카카오 그룹은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라는 고약한 질병 덕분에 도리어 사세가 급속도로 팽창하는 기이한 행운을 얻었다.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활동이 비대면으로 급속하게 전환되는 새로운 흐름 덕분이었다.

/그래픽=오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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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 그룹은 그동안 쪼개기 중복 상장 논란, 계열사 고위 임원들의 탐욕적인 스톡옵션 행사, 데이터 센터 화재에 따른 핵심 서비스 먹통 사태 등등 온갖 악재들이 잇따라 발생하는 바람에 계열사 대부분의 주가가 가파른 하락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올해 봄 SM엔터테인먼트 인수를 무리하게 추진하는 바람에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창업주가 소환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김범수 의장의 오른팔로 불리는 투자총괄 대표가 이미 구속된 상태여서 그룹 총수에 대한 사법 리스크가 고조되는 형국이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2월 에스엠 경영권 인수전이 벌어졌을 당시 카카오 경영진이 하이브의 공개매수를 방해할 목적으로 대규모의 자금을 투입해 에스엠의 주가를 고의적으로 끌어올렸다고 의심하고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구속된 배재현 투자총괄 대표와 특별한 관계인 사모펀드의 대표이사까지도 금융감독원의 조사를 받았다. 카카오 그룹은 이 같은 지분 취득 과정에서 '대량 보유 지분 변동 보고'를 하지 않은 혐의도 받고 있다. 금감원은 김범수 의장이 경영권 분쟁 당시 시세 조종을 지시했거나 보고받았을 개연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대주주가 벌금형 이상의 처벌을 받으면 카카오뱅크의 지분 10%를 초과하는 지분은 매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때는 삼성그룹 이재용 회장보다 더 많은 재산을 자랑하던 '대한민국 넘버원 부자' 김범수 의장이 하루아침에 시세 조종의 피의자로 바뀌어 금융감독원으로 출두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주말을 앞두고 터져 나온 두 가지 우울한 소식을 접한 투자자들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주가 조작범들을 반드시 패가망신시키겠다는 금융감독 당국의 엄벌 의지가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사실 앞에 기뻐해야 옳을까? 이토록 공공연하면서도 대담한 주가 조작 범죄가 지금껏 활개를 치도록 방치된 사실에 슬퍼해야 할까? 중동전쟁과 고금리 환경 등으로 국내 증시가 연일 급락세인데, 이토록 불쾌하고도 짜증 나는 악재까지 덤으로 뒤집어써야 하다니 국내 투자자들은 도대체 누굴 원망해야 좋을까?

/그래픽=오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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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 다른 사람의 눈으로 행복을 들여다보는 것은 얼마나 씁쓸한 일이냐! -윌리엄 셰익스피어 <뜻대로 하세요> 5막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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