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다 [강태운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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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다 [강태운의 빛과 그림자]
  • 강태운 미술칼럼니스트
  • 승인 2023.08.29 08:3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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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청년 에드워드 호퍼는 스물네 살에 처음 파리에 입성했다. 파리는 호퍼의 상상 너머에 있었다. 모든 면에서 절정이었다. 장구한 역사를 간직한 파리의 모습에 호퍼는 매료되었다. “파리는 아주 우아하고 아름다운 도시여서 세련되지 않고 무질서한 뉴욕을 보다 보니 이곳이 더 정돈이 잘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다정하게 느껴집니다”. 파리의 봄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햇빛도 놀라웠다. 호퍼는 기차와 버스가 규칙적으로 제시간에 운행되는 것은 오랜 경험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해했다. 모든 것이 불투명했던 자신의 삶에 비해 파리는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생동하고 있었다. 자연과 문명이 오래 호흡하여 조화로운 파리는 호퍼에게 이상적으로 다가왔다.

도시의 보편적 조화에 집중했던 호퍼의 마음을 구체적 현실로 이끌어준 것은 자기 손이었다. 호퍼는 평소에 익혔던 방식대로 손 가까이에서부터 주변의 삶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파리지앵의 모습과 카페와 가게, 그리고 거리에 쏟아지는 빛과 조명까지 호퍼의 손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무엇보다도 잉크 스케치만으로 가늠할 수 없는 거리의 주체로서 그들의 동기가 궁금했다. 이상적인 파리의 모습 못지않게 호퍼에게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카페와 정부(情婦)였다. 사람들이 주어진 사명이 아니라 쾌락에 열정을 쏟는 장면은 앵글로색슨의 청교도적 환경에서 자란 호퍼에게 놀라움 그 자체였다. 파리는 모든 것의 절정이었지만 그늘이 있었다. 다만 자신이 그늘이라고 여긴 것들이 파리에서는 반대로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파리의 그늘은 온전히 빛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이면에 깔린 불안과 불만으로 인해 도시는 자신의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대면하지 못하고 밝게 왜곡하고 있었다. 그것은 호퍼가 뉴욕에서 느꼈던 감정과 무관하지 않았다. 호퍼는 너무 느린 사회 변화도 불만이었지만, 너무 빠른 변화 역시 불만이었다. 특히 성(性)에 대한 욕망은 청교도적 가치와 어긋나면서 젊은 호퍼 안에서 헛돌았다. 파리의 농밀함에 호퍼는 흔들렸다. 일상에서는 모른 척 묻어 두었던 모순적 감정들이 굴레에서 벗어난 파리에서 자연스레 드러난 것이다. 파리의 햇빛은 호퍼 자신이 알던 것과 달랐고, 그늘도 좀 더 밝고 더 많은 빛을 반사했다. 호퍼는 파리에서 잠시 인상주의 영향 아래 있었지만, 마냥 밝은 톤으로 빛의 변화를 좇는 방식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림자의 안 받침이 없는 빛은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이 호퍼의 생각이었다. 호퍼의 그림에는 빛과 그림자가 함께한다.

호퍼의 마음속에는 맑고 햇빛 가득한 뉴욕 하늘이 있었다. 뉴욕은 거칠고 황량했지만, 맑은 햇빛 아래 온전히 자신의 그림자를 드러냈다. 화가라면 자신과 사회의 이면에 드리운 그림자와 온전히 대면해야 한다고 호퍼는 생각했다. 그림자와 온전히 대면해야 온전한 빛을 세울 수 있을 터였다. 자신의 삶은 그렇지 못하더라도 자기 손은 그림자 앞에 정직해야 했다. 그 정직함이란 이미 정형화된 어떤 것일 수 없기에, 나아가면서 길을 찾아야 했다. 나아가면서 길을 찾는 일은 모든 것의 절정이었던 파리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개척 정신으로 대변되는 뉴욕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호퍼의 시작은 뉴욕이었다.

호퍼는 뉴욕과 유럽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혼란을 가중한 것은 1907년 뉴욕에서 시작된 금융위기였다. 주가는 폭락하고 경제는 공황에 빠져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파리는 자신을 매료시킨 빛이었지만 자신이 설 수 없는 그림자였다. 뉴욕은 자신의 야심을 펼칠 기회의 땅이었지만 현실은 불확실성으로 인해 기댈 곳이 없었다. 호퍼는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그토록 싫어했던 삽화에 한동안 의지했다. 상업적 그림이라도 일거리를 받기 위해 거래처 입구를 서성였지만, 속으로는 그런 끔찍한 일을 맡기지 않기를 바랐다. 빛과 그림자는 늘 함께 왔다. 빈발하는 갈등에서 고조되는 내적 고독감은 결코 주위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온전히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심리적 안정을 주는 요인과 혼란을 주는 요인은 사실 한 몸이었고, 서로 갈등을 부추겼다. “나는 유럽을 극복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호퍼가 파리를 방문한 이후 근 10년은 유럽과 뉴욕을, 그리고 각 공간에 모순적으로 상존하던 빛과 그림자를 자신의 내면에 조화롭게 수용하기 위해 분투했던 시간이었다. 호퍼는 빛과 그림자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면서 화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한발 다가설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1933년 호퍼는 휘트니 미술관 전시회에 참가하면서 ‘공부한 곳’을 쓰는 칸에 ‘뉴욕과 유럽’이라고 적었다.

자기중심적인 호퍼에게 유일한 소통의 통로는 그림이었다. 호퍼가 애정을 담아 그렸던 파리 모습을 살펴보면, 호퍼가 개별적 사람들의 심리 상태와 감정의 상호 작용을 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푸른 저녁』이 대표적이다. 호퍼는 이 작품에서 드디어 대중적 관심을 끌어낼 만한 심리적 긴장감을 구현했다고 믿었다. 스스로 원숙해졌다고 여겼던 표현 방식을 통해 대중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시도에서 호퍼는 소통이 좌절되는 경험을 한다. 호퍼의 활동 무대는 뉴욕이었고, 비평가들은 “호퍼가 상습적으로 압생트를 마시는 한 무리의 파리 사람들을 그린다”는 비판적 견해를 보였다.

'푸른 저녁', 1914년, 91.8 x 182.7,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출처=서울시립미술관
'푸른 저녁', 1914년, 91.8 x 182.7,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출처=서울시립미술관

내면의 갈등은 긴장감을 유발한다. 내면의 갈등과 긴장감은 사람마다 결이 다르기에 개별적이다.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도 재가 날리는 뒤안길에 서면 결국 자신의 욕구를 상대에게 투사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름날 푸른 저녁이면 난 들길을 가리라” 아르튀르 랭보의 시구절을 읊조리며 <푸른 저녁>으로 비상을 꿈꿨던 호퍼는 두 번 다시 프랑스적인 주제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봄은 오지 않았고 호퍼는 길을 잃고 휘청거렸다.

재정적 어려움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고 이제는 과연 그림을 그려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으로 호퍼는 며칠씩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이젤 앞에 앉아 있곤 했다. 그런 날이면 하늘은 바람 한 점 구름 한 점 없이 파랬고, 따뜻하지도 춥지도 않은 햇빛은 아무런 표정 없이 벽에 내렸다. 시간이 멈춘 듯 미동 없는 길 위에서 누구도 호퍼에게 손짓하지 않았다. 폭풍우라도 불어서 죄다 날려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정작 흔들리는 건 차마 울지 못한 호퍼의 마음뿐이었다. 이는 비단 호퍼에게 국한된 경험이 아니었다. 단절된 관계로 소통이 좌절된 경험은 뉴욕 전체를 비추고 있었다. 표정 없는 햇빛이 드리운 거리와 건물의 창백한 풍경은 호퍼의 무의식에 강하게 자리 잡았다. 이후로 호퍼는 <푸른 저녁>처럼 자신 내면에 부유하는 빛과 그림자를 그리지 않았다. 자기 내면이 투사된 거리와 건물의 빛과 그림자를 그렸다.

호퍼의 빛은 무한히 넓어져 모든 것을 비추려 하지 않는다. 깊숙이 불을 밝혀 속속들이 알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자리에 서 있는 우리는 결코 같은 풍경을 볼 수 없다는 좌절을 비추는 빛이다. 더 이상 말할 수 없고 주위와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직시할 때 사람은 외로움을 느낀다. 외로움이라는 보편적 정서에 닿을 때 외로움을 아는 사람 사이에는 곁이 되어주는 공감과 소통이 시작된다. ‘너도 참 외롭겠구나.’ 그토록 원했던 입장의 동일함에 우회하여 도달하는 운명의 장난 같은 빛이다.

그림은 방어가 적어 내면의 무의식을 담아내는데, 말이나 글보다 효과적이다. 호퍼는 자신의 그림에 드리워진 외로움에 대해 “전혀 의식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 내가 외로운 사람인 모양이다”라고 회고했다. 내적 갈등으로 자주 고뇌하던 호퍼는 외로움에 익숙했다. 심리 상태와 감정의 상호 작용을 그림에 담겠다는 꿈이 무너졌을 때, 방향을 잃고 휘청거리는 자신과 달리 성공 가도를 달리는 동료들을 지켜볼 때 호퍼는 외로웠다. 호퍼는 자신의 그림에 무의식적으로 반영된 외로움이라는 정서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내면과 소통할 수 있었다. 외로움은 사회적 단절을 겪는 당시 뉴욕 사회에 팽배한 정서이기도 했다.

'빈방의 빛', 1963년, 73 x 100, /출처=개인소장
'빈방의 빛', 1963년, 73 x 100, /출처=개인소장

호퍼는 빛과 그림자의 특유한 대비 위에 대담한 구도와 심리적 재구성을 통해 내면 풍경을 발현했다. 호퍼는 볕이 드는 양지(陽地)를 추구하지 않았다. 햇볕 한 장의 어설픈 위로는 사양했다. 호퍼는 어둠이 깔린 집 벽에 비치는 햇볕을 그리고 싶었다. 그 볕은 수많은 단절이 낳은 표정 없는 외로움이었다. 영국 <가디언>은 ‘오늘날 우리는 모두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다’라는 기사를 냈다. 우리가 호퍼의 그림 앞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다.

※ 본 글은 <에드워드 호퍼 : 빛을 그린 사실주의 화가>(게일 레빈 지음, 최일성 옮김), <에드워드 호퍼 : 길 위에서>(서울시립미술관), <호퍼 Hopper>(롤프 권터),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엄기호)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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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숙 2023-08-30 17:00:52
호퍼의 그림에 의미를 확장해서 알게 된 좋은 글 감사합니다.

명문사냥꾼 2023-08-30 15:09:13
번득이는 통찰 따스한 시선.. 참으로 좋은 글입니다. 앞으로도 오래도록 접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햇볕 한 장의 어설픈 위로는 사양했다. 호퍼는 어둠이 깔린 집 벽에 비치는 햇볕을 그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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