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러짐’의 물리학 [김범준의 세상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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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러짐’의 물리학 [김범준의 세상물정]
  • 김범준 편집위원(성균관대 교수)
  • 승인 2023.01.24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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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장의 지폐를 세거나 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는 살짝 손가락에 침을 묻히면 편하다. 물기로 촉촉한 손가락은 마찰력이 커 종이를 쉽게 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비가 와 길이 젖으면 마찰력이 줄어 쉽게 미끄러진다. 우리 모두 익숙한 경험이지만 참 신기하다. 표면이 물에 젖은 것은 마찬가지인데 손가락의 마찰력은 커지고 빗길의 마찰력은 줄어든다. 이런 차이는 왜 생길까?

뉴턴의 물리학을 학교에서 배울 때 마찰력이 자주 등장한다. 물체를 표면 위에서 옆으로 밀 때 물체가 안 움직이려 뻗대는 힘인 마찰력의 크기는 표면이 물체에 수직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인 수직항력의 크기에 비례한다. 더 무거운 물체는 수직항력도 커서 마찰력도 크고, 같은 물체라도 힘을 주어 위에서 누르면 그 힘의 반작용으로 수직항력도 커져 마찰력도 함께 커진다. 어떤 물체를 어떤 표면위에서 옆으로 미는 지에 따라 같은 수직항력이어도 마찰력이 달라지기도 한다. 마찰계수가 바로 마찰력과 수직항력의 비례관계식의 비례상수다. 더 무거운 물체를 마찰계수가 더 큰 표면위에서 밀어 움직이려면 마찰력이 커서 더 큰 힘이 필요하다.

그림1.  책 위에 동전을 놓고 책의 경사각을 점점 크게 하면 중력이 마찰력을 이겨 동전이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이때의 경사 각도로 마찰계수를 잴 수 있다.
그림1. 책 위에 동전을 놓고 책의 경사각을 점점 크게 하면 중력이 마찰력을 이겨 동전이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이때의 경사 각도로 마찰계수를 잴 수 있다.

물리 교과서에는 마찰계수를 측정하는 간단한 방법도 나온다. 동전을 책 위에 올려놓고 책을 점점 가파르게 기울이면 책의 표면이 수평면과 이루는 각도가 어느 값보다 커지는 순간 동전이 미끄러져 내려온다. 이때의 각도를 재서 삼각함수의 하나인 탄젠트 값을 구하면 마찰계수를 얻게 된다. 마찰계수는 실험으로 간편하게 측정할 수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궁금하다. 도대체 마찰력은 왜 생기는 것일까?

책 위에 놓인 동전의 접촉면을 현미경으로 확대해 본다고 상상해보라. 동전이나 책이나 두 물체의 표면이 완벽한 평면일리는 없으니, 둘이 만나는 곳을 확대해보면 둘 다 오돌토돌할 수밖에 없다. 동전의 표면에서 볼록 솟은 부분이 책의 표면에서 볼록 솟은 부분과 가까이에서 만난다. 당연히 표면이 더 오돌토돌할수록 옆으로 밀려면 더 큰 힘이 필요하다. 거친 표면의 마찰력이 더 크다. 그렇다면 비가 내린 도로가 미끄러운 이유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림2.  확대하면 보이는 오돌토돌한 두 면. /출처=위키미디어
그림2. 확대하면 보이는 오돌토돌한 두 면. /출처=위키미디어

내 신발 바닥이나 도로나 표면은 상당히 거친데 비가 오면 물의 얇은 막이 둘 사이에 생긴다. 두 거친 면의 볼록한 부분들 사이의 거리가 얇게 형성된 물의 막으로 늘어나고, 결국 마찰계수가 줄어든다. 비로 흠뻑 젖은 길이 마른 길보다 더 미끄러운 이유는 내 신발 바닥과 길 사이에 형성된 얇은 물의 막이 마치 윤활유처럼 작용하기 때문이다. 빗길이 미끄러운 이유는 이처럼 거시적인 규모의 표면 거칠기(roughness)로 이해할 수 있다.

오늘 소개할 논문(DOI: 10.1103/PhysRevLett.129.256101)은 공기 중에 수분이 있는 상황에서 거의 매끈한 두 면이 만날 때 어떻게 마찰력이 만들어지는 지를 미시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연구를 담고 있다. 논문의 저자들은 규소로 이루어진 원판 모양의 평평한 웨이퍼 표면 위에 마찬가지로 규소로 만든 작은 고체 구를 둥근 웨이퍼의 중심에서 벗어난 위치에 올렸다. 그리고는 규소 고체 구를 웨이퍼 쪽인 아래로 밀어 일정한 크기의 수직항력을 만들어냈다. 이 상황에서 아래에 놓인 규소 판을 원의 중심을 통과하는 회전축으로 돌려 움직이면 규소 고체구와 규소 웨이퍼 사이에 수평방향의 마찰력이 작용하게 된다. 논문의 연구자들은 이 마찰력을 직접 정밀하게 측정하고는 이미 정확히 재서 알고 있는 작은 수직항력의 크기로 나누어 마찰계수를 측정했다. 공기 중의 상대습도를 체계적으로 바꿔 가면서 마찰계수가 어떻게 변하는 지를 직접 실험을 통해 측정한 것이 논문의 주요 결과다. 마찰계수의 값은 공기 중의 수분이 거의 없는 아주 건조한 상황의 작은 값에서 시작해서 상대습도가 약 20%에 정도에 이를 때까지는 계속 증가하지만, 상대습도가 20%보다 더 높아지면 마찰계수가 점점 줄어든다는 실험결과를 얻었다.

먼저, 상대습도가 20%를 향해서 점점 증가할 때 마찰계수가 커지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상대습도가 거의 0의 값에서 시작해서 조금 높아지면 거의 매끈한 두 면이 만나는 영역의 아주 야트막한 오돌토돌한 부분 사이를 연결하는 가는 물기둥이 모세관 현상으로 만들어진다. 바로 물 분자가 가지고 있는 전기적인 극성 때문이다. 모세관 현상으로 만들어진 작은 물기둥이 규소 고체구와 규소 웨이퍼 사이를 연결하게 되면 수평방향의 움직임을 방해해 둘 사이의 마찰력은 커진다. 그리고 상대습도가 높아지면 더 많은 물기둥이 둘을 연결하니 점점 더 마찰력도 커지게 된다. 하지만, 모세관 현상으로 인한 마찰력의 증가 효과는 물기둥이 상당히 많이 생긴 다음에는 그 영향이 사라진다. 이제 더 늘어난 수분은 마찰계수를 오히려 줄어들게 만든다. 실험에서 20%정도에 도달할 때까지 마찰계수가 커지다가 이후에는 줄어드는 이유를 우리는 정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논문 저자들은 건조한 상황에 비해서 상대습도가 100%로 표면이 흠뻑 젖은 상황일 때 마찰계수가 더 크다는 재밌는 실험결과도 보고했다. 물에 흠뻑 젖은 거친 빗길은 미끄럽지만 거시적으로는 거의 매끈한 표면은 물에 젖으면 오히려 마찰력이 커진다는 이야기다. 규소의 두 표면이 완전히 건조한 상황에서나 물로 흠뻑 젖은 상황에서나 모세관 현상으로 인한 효과는 전혀 없다. 그런데도 흠뻑 젖으면 마찰계수가 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들이 이용한 실험방법이 흥미롭다. 바로, 원자핵에 중성자가 하나 더 들어있는 수소의 동위원소로 만든 물인 중수를 이용한 것이다. 보통의 수소로 만든 물이나 중수나 전기적인 성질은 거의 같지만 수소원자핵의 질량이 달라서 수소결합의 강도는 상당히 다르다. 물의 끓는점이 100도로 상당히 높은 이유도 수소결합 때문인데 중수의 끓는점이 보통의 물보다 더 높다. 그 이유는 당연히 중수의 수소결합의 강도가 더 크기 때문이다. 논문 저자들은 중수를 보통의 물 대신에 이용하면 흠뻑 젖은 상황에서의 마찰계수가 더 커진다는 실험결과를 얻었다. 결국, 완전히 흠뻑 젖은 매끈한 표면이 건조한 표면보다 마찰계수가 더 큰 것은 수소결합 때문이라는 결론이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책장을 더 쉽게 넘길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수소결합 때문일 것이라는 흥미로운 추측이다. 이처럼 일상의 익숙한 경험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과학의 힘이다. 침 묻혀 책장 넘겨 책을 읽을 때, 너무나도 작은 규모에서 일어나는 수소결합을 떠올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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