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크리스털’ [김범준의 세상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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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크리스털’ [김범준의 세상물정]
  • 김범준 편집위원(성균관대 교수)
  • 승인 2022.01.25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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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에서 ‘크리스털’(결정)은 구성 입자들이 공간 안에서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 /이미지=픽사베이
물리학에서 ‘크리스털’(결정)은 구성 입자들이 공간 안에서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 /이미지=픽사베이

‘크리스털’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손톱으로 튕기면 맑은 소리가 나는 크리스털 유리잔, 그리고 수정이나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투명한 아름다운 보석이 떠오른다. 크리스털의 우리말 번역은 결정(結晶)이다. 물리학에서 결정은 구성 입자들이 공간 안에서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

일상에서 크리스털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금속은 투명하지 않아도 실제로는 결정이다. 내부의 원자들이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다. 수정과 금속은 둘 다 결정이지만, 각각을 구성하는 원자는 종류가 다르다. 금속을 이루는 원자 하나가 가진 여러 전자 중에는 원자핵으로부터 더 먼 거리에 있는 전자가 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전자들은 원자핵에 꽉 묶여있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지만, 금속 원자 바깥쪽 전자들은 상대적으로 원자핵에 속박된 정도가 약하다.

원자들이 금속 결정 안에서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으면 원자핵에 약하게 속박된 전자 하나는 넓게 펼쳐진 모습의 양자역학 파동함수를 갖는다는 것을 보일 수 있다. 파동함수 진폭의 제곱이 전자가 그곳에 있을 확률에 해당한다는 양자역학 이론에 따르면, 이 전자는 금속 안 어디에나 자유롭게 있을 수 있다는 의미다.

당연히 이처럼 넓게 펼쳐진 전자들이 많이 있는 금속은 전류를 쉽게 흘리게 된다. 많은 금속이 전류가 잘 흘러 저항이 작은 도체가 되는 이유는 금속의 규칙적인 결정구조 덕분이다. 작은 전압을 걸어주어도 금속 안 많은 전자가 쉽게 움직여 금속의 전기 저항을 아주 작게 만든다.

눈앞에 있는 고체가 전기가 잘 통하는 도체인지, 저항이 큰 부도체인지를 쉽게 알 수 있는 재밌는 방법이 있다. 도체 안의 많은 자유전자는 전류가 잘 흐르게 할 뿐 아니라, 열도 쉽게 잘 전달한다는 것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실내 온도가 섭씨 20도인 방 안에서 고체를 손가락으로 만져보자. 고체 안 자유전자가 많다면 36.5도로 체온이 방안 기온보다 높은 내 손가락의 열이 고체 쪽으로 쉽게 전달되어 손가락 온도가 빨리 내려간다. 즉, 손가락으로 건드려보니 차갑게 느껴졌다면 십중팔구 도체다. 같은 방에서도 나무 책상보다 철제 선반이 더 차갑게 느껴지는 이유다. 건전지를 연결해서 저항값을 측정하지 않아도 손가락으로 살짝 만져서 도체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방법이다.

전기적인 도체가 가진 재밌는 성질은 더 있다. 도체는 말 그대로 그 안의 전자가 쉽게 움직일 수 있는 물질이다. 이를 이용하면 도체 안에서는 전기장이 0이라는 것을 아주 쉽게 증명할 수 있다.

만약 도체 안 어디에선가 전기장이 0이 아닌 곳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전자가 전기장 안에 있으면 전기력이 작용해서 현재의 위치를 떠나 다른 곳으로 움직이게 된다. 결국 시간이 지나서 모든 전자의 움직임이 멈춘 평형상태에 도달하면, 도체 안 어디에서나 전기장이 0이어야 한다. 만약 0이 아니라면 조금 더 기다리시라. 결국 모든 전자의 움직임이 멈추고, 그때 도체 안 어디서나 전기장은 0이 된다. 도체 밖 전기장이 있어도, 결국 도체 안 전기장은 어디서나 0일 수밖에 없다.

전기장과 자기장이 얽혀 서로 상대를 유도하면서 진행하는 파동이 빛과 같은 전자기파다. 도체 밖에 전자기파가 있어도, 도체 안 전기장은 0일 수밖에 없고 전기장이 유도하는 자기장도 마찬가지로 0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금속 밖 빛은 금속의 표면을 뚫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금속의 표면에서 반사된다. 금속이 우리 눈에 불투명해 보이고, 외부의 조명 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이유도 바로 금속 안에 자유전자가 많기 때문이다.

금속으로 둘러싸인 엘리베이터 안에서 휴대폰 통화가 잘 안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휴대폰 통신에 이용하는 전자기파는 엘리베이터의 바깥을 빙 두르고 있는 금속물질을 뚫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물리학에서는 ‘대칭성’이라는 개념이 무척 중요하다. 빈 공간 안에 딱 입자 하나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입자는 상호작용할 아무런 다른 입자가 없고, 따라서 공간 안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현재 입자의 위치에서 옆으로 1mm 옮겨진 위치든, 1cm 옮겨진 위치든, 바로 이곳이 아닌 그 옆 저곳에는 입자가 있을 수 없다는 물리법칙이 존재할 리 없다. 이럴 때 물리학에서는 이 시스템이 공간 옮김 대칭성이 있다고 말한다. 옮겨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뜻이다.

물리학의 근본법칙에는 공간 옮김 대칭성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보는 세상은 공간 옮김 대칭성이 성립하지 않는다. 물리법칙은 내가 이곳에 있든 저곳에 있든 모든 장소를 내게 허락하지만, 어쨌든 나는 바로 지금 이곳에 있지, 저곳에 있지 않다. 물리학의 근본 법칙에는 공간 옮김 대칭성이 있지만, 현실에 구현된 나의 존재는 공간 옮김 대칭성이 저절로 깨졌기에 가능하다.

원자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결정구조를 갖는다는 것의 의미를 공간 옮김 대칭성으로 생각해보자. 옆으로 특정 거리를 움직일 때마다, 그곳에 원자가 하나씩 있는 모습인 결정구조 안에서는 공간 옮김 대칭성이 독특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결정 안 원자 사이의 거리가 a라면, 딱 a만큼 옮기면 전체 결정구조가 처음의 결정구조와 완전히 겹치게 된다. 결정은 띄엄띄엄(discrete) 불연속적인 공간 옮김 대칭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a의 거리만큼 옮기는 공간 옮김에 대해서는 대칭성이 있지만, a/2, a/10 등등 다른 거리를 옮기는 공간 옮김에는 대칭성이 없다. 공간 결정에서는 연속적인 공간 옮김 대칭성은 깨져있지만, 불연속적인 공간 옮김 대칭성이 존재한다.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으로 시간과 공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 현대 물리학은 시간과 공간을 독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사진=픽사베이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으로 시간과 공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 현대 물리학은 시간과 공간을 독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사진=픽사베이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으로 시간과 공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 현대 물리학은 시간과 공간을 독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상대론 이전의 물리학에서는 3차원의 공간과 이와는 별도로 1차원의 시간을 이야기했다면, 현대의 물리학은 둘을 함께 아울러 4차원 시공간을 말한다. 여기서 재밌는 상상을 한 사람이 바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프랑크 윌첵(Frank Wilczek)이다.

시간을 공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 상대론으로 미루어 생각해보자.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고체 금속이 공간에 구현된 결정이라면, 시간에 구현된 결정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무언가가 공간 축을 따라 규칙적으로 배열된 것이 공간 결정이라면, 시간 결정은 어떤 무언가가 시간 축을 따라 규칙적으로 배열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고체 금속 안 한 원자에서 출발해 특정 거리 a만큼 공간 축을 따라 진행할 때마다 우리가 다른 원자를 하나씩 볼 수 있는 것처럼, 시간 결정 안에서는 특정 시간 t가 진행할 때마다 어떤 무언가가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시간 결정에서는 연속적인 시간 옮김 대칭성은 깨져있고, 대신 불연속적인 시간 옮김 대칭성이 존재한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공간 결정이 다른 모습이 아닌 바로 그 모습의 결정이 되는 이유는, 원자들이 바로 그렇게 규칙적으로 배열할 때 전체의 에너지가 가장 낮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숙한 공간 결정을 계속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 추가로 필요한 에너지는 없다. 그냥 온도를 낮춰 가면 공간 결정이 되고, 이후에는 그냥 내버려 둬도 공간 결정이 유지된다.

1분의 시간이 지나면 정확히 같은 위치로 돌아오는 벽시계의 초침은 특정 시간이 지날 때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하지만, 시간 결정이라고 할 수는 없다. 건전지를 연결하든, 태엽을 감든, 우리가 에너지를 끊임없이 공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에너지의 유입 없이도 같은 상태가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다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시간 결정은 가능한 것일까?

양자역학 시스템에서 시간 결정을 구현했다는 물리학 이론·실험 연구가 연이어 보고되고 있다. 최근 구글의 양자 컴퓨터를 이용한 연구에서는 20개의 초전도 큐빗(qubit)으로 특정 유형의 양자 상태(다체 한곳 상태, many-body localized state)를 구현하고는 레이저를 이용해 주기적으로 구동했다. 무려 100번 이상 똑같은 양자 상태가 시간에 따라 규칙적으로 다시 반복되는 것을 실험으로 관찰했다. 우리가 이용하는 일상의 시계와는 달리, 실험에 이용한 레이저가 공급한 에너지의 총합이 0인데도 말이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론과 일반 상대론이 탄생할 때, 그로부터 약 100년 뒤 우리 휴대폰 내비게이션에 두 이론이 이용될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단연 아무도 없었다. 시간의 결정, 시간의 크리스털이 우리 곁에 다가올 먼 미래의 반짝이는 멋진 모습이 무척 궁금하다. 현실에서의 이용 가치가 적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게는 시간 크리스털의 아이디어가 이미 무척이나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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