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 가는 이유 [김범준의 세상물정]
상태바
‘지옥’에 가는 이유 [김범준의 세상물정]
  • 김범준 성균관대 교수
  • 승인 2021.11.29 09: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과학은 반증 불가능한 주장에 대해서는 참과 거짓을 판단하지 않는다. 사진은 드라마 ‘지옥’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과학은 반증 불가능한 주장에 대해서는 참과 거짓을 판단하지 않는다. 사진은 드라마 ‘지옥’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요즘 인기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을 재밌게 봤다. 난 물론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사실 내 생각은 이보다는 좀 더 강하다. 스스로를 간혹 독실한 무신론자라고 소개하기도 하는 나는 지옥이 없다고 확신한다. 내 믿음을 증명할 수는 물론 없고, 있다고 믿는 사람을 그렇지 않다고 설득하기도 어렵다. 그래도 오해는 마시길.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은 아니니까.

“우리 지구에서 수십억광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어느 외계 행성에 나와 같은 이름의 외계인이 존재한다”라는 내 주장은 현재로서는 반증이 불가능하다. 이 엉뚱한 주장을 우리가 반증할 수 없다고 해서, 정말로 나와 같은 이름의 외계인이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가 될 리는 없다. 과학은 반증 불가능한 주장에 대해서는 참과 거짓을 판단하지 않는다. 단지 이런 주장은 과학적인 고려의 대상이 전혀 될 수 없다고 얘기할 뿐이다.

과학이 확실한 진리를 말한다고 많은 이가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과학에서 말하는 진실은 많은 경우 잠정적인 성격을 가진다. 과학은 확실성의 정도가 제각각인 여러 지식의 모임에 가깝다. 지금까지는 반례가 명확히 발견되지 않은 것들이 모여 과학이라는 빌딩을 이룬다. 과학이라는 빌딩의 건축은 자세히 보면 엄밀한 의미에서는 일종의 부실공사다. 튼튼한 기둥이 건물 전체를 받치고 있는 것은 맞지만, 단단해 보이는 기둥도 자세히 보면 여기저기 있어야 할 벽돌이 없는 곳도, 맞지 않는 벽돌을 누군가 억지로 욱여넣은 곳도 보인다.

나무토막을 높게 가지런히 쌓아놓고 번갈아 하나씩 나무토막을 빼내는 게임이 있다. 게임을 해본 사람은 누구나 알 듯이 어느 정도 빈 곳이 있어도 전체는 무너지지 않고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과학이라는 빌딩의 모습이 이와 같다. 이 게임에서는 나무토막을 빼내는 것이 중요하지만, 과학의 빌딩에서는 건물 속 빈 곳을 찾아 그곳에 딱 맞는 벽돌을 채워 넣는 것이 중요하다. 빈 곳을 먼저 찾아 채워 넣는 것, 맞지 않은 벽돌을 찾아 딱 맞는 벽돌로 교체하는 것, 그리고 가장 높은 층에 벽돌 하나를 새로 놓는 것이 대부분 과학자가 진행하는 연구다.

‘젠가’라는 이름의 게임에서는 나무토막을 빼내는 것이 중요하지만, 과학의 빌딩에서는 건물 속 빈 곳을 찾아 그곳에 딱 맞는 벽돌을 채워 넣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픽사베이
‘젠가’라는 이름의 게임에서는 나무토막을 빼내는 것이 중요하지만, 과학의 빌딩에서는 건물 속 빈 곳을 찾아 그곳에 딱 맞는 벽돌을 채워 넣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픽사베이

내일 당장 객관적으로 재현 가능한 명확한 실험결과가 기존의 과학이론에 모순된다는 것이 알려지면, 과학이라는 건물은 보수 공사에 들어간다. 대부분의 발견은 별로 어렵지 않은 부분 공사 정도로 충분하다. 하지만 드물게는 과학의 빌딩을 떠받치고 있는 토대가 무너져 바닥공사부터 시작해 일층, 이층, 삼층, 재건축 공사를 시작해야 할 때가 있다. 20세기 초 상대성 이론과 양자 이론이 등장할 때 벌어진 대규모 공사가 그랬다. 재건축 이전 오랜 동안의 빌딩 건설이 헛수고였던 것은 아니라는 것도 중요하다. 해체된 건물을 구성했던 벽돌 중 많은 벽돌이 재건축 공사에 다시 쓰인다.

지옥이 없다는 내 과학자로서의 확신도 당연히 잠정적이다. 만약 지옥이 있다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증거가 발견되면 나는 기존의 믿음을 바꿀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명확한 증거가 발견되고 객관적으로 검증되기 전에는 지옥이 없다는 잠정적인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천국과 지옥을 믿는 사람들의 생각은 무척 직관적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결국 벌을 받고, 선행을 한 사람은 큰 보상을 받는다는 믿음이다. 수많은 사람을 자국의 군인을 동원해 학살한 사람도 뉘우침 없이 살다가 사망한 최근의 사례를 봐도, 죄지은 이가 꼭 현세에서 큰 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 죄 지은 자가 결국은 저 세상에서 벌을 받고, 현세에 착하게 산 사람은 그 곳에서 영원한 큰 상을 받는다는 믿음은 많은 사람에게 분명히 큰 위안을 준다. 우리가 원한다고 모두 진실인 것은 아닐 뿐이다.

명확한 증거가 발견되고 객관적으로 검증되기 전에는 지옥이 없다는 잠정적인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사진은 영화 ‘신과 함께 –죄와 벌’의 한 장면.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명확한 증거가 발견되고 객관적으로 검증되기 전에는 지옥이 없다는 잠정적인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사진은 영화 ‘신과 함께 –죄와 벌’의 한 장면.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죄를 지은 사람은 지옥에 간다”라는 명제의 논리구조는 “p이면 q이다”의 형식이다. 이럴 때는 p가 참이면 q도 참이어야 하지만, 만약 p가 거짓이면 q가 참이든 거짓이든 전체 명제 “p이면 q이다”는 참이 된다. 내가 친구에게 “이번 달 월급 받으면 한 턱 낸다”라고 말했을 때, 월급을 받으면 한 턱 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월급을 받지 않으면 내가 친구에게 한턱을 내든 아니든 내가 한 약속에 모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쉽게 알 수 있다. 즉, “죄 지으면 지옥 간다”가 참이라고 해도, 죄를 짓지 않은 사람 중에도 지옥 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드라마 <지옥>이 묻는 질문을 “벌 받았다고 죄 지은 걸까?”라고 나름 한 줄로 줄여보았다. “죄를 지은 사람은 지옥에 간다”가 참이라고 해도, 지옥에 갔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죄를 지은 것은 아닐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이 이와 닮았다. 안 좋은 일은 좋은 사람에게도 생길 수 있다. 벼락에 맞은 사람은 죄 지은 사람이라는 믿음은 미신이고, 최선의 노력을 한 사람 중에도 결국 실패하는 사람이 생긴다. 실패했다고 해서 노력이 부족했다고 그 사람만을 탓할 수는 없다. 결과가 막상 벌어지고 나면, 그 결과를 만든 딱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있다고 믿는 것은 과학적이지 않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은 수많은 것들이 서로 관계를 맺어 일어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모습은 아니지만, 안 좋은 일은 착한 사람에게도 생기고, 나쁜 사람이라고 모두 벌을 받지는 않는다. 물론, 착한 사람은 보상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의 모습이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모습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노력은 분명히 필요하다. 저 세상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