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창의 소설’이 멋진 까닭 [김범준의 세상물정]
상태바
‘테드 창의 소설’이 멋진 까닭 [김범준의 세상물정]
  • 김범준 편집위원(성균관대 교수)
  • 승인 2021.09.29 11: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테드 창은 과학에 기반한 흥미로운 질문을 먼저 던지고 그 질문을 중심축으로 소설의 줄거리를 펼쳐나간다. /사진=출판사 엘리(북하우스)
테드 창은 과학에 기반한 흥미로운 질문을 먼저 던지고 그 질문을 중심축으로 소설의 줄거리를 펼쳐나간다. /사진=출판사 엘리(북하우스)

주변의 여러 물리학자가 “물리학자를 위한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평가하는 몇몇 SF 소설가가 있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테드 창이다. 과학자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멋진 소설을 쓴다. 대학에서 물리학과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테드 창은 과학에 대한 깊은 이해에 바탕한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자신이 익힌 과학 지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깊은 고민과 성찰을 소설에 담아낸다. 과학에 기반한 흥미로운 질문을 먼저 던지고 그 질문을 중심축으로 줄거리를 펼치는 것이 테드 창 소설 작법의 특징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는 모두 8편의 단편이 담겨있다. 영화 <컨택트>로도 만들어져 유명한 <네 인생의 이야기>는 고전역학을 기술하는 두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소설의 중심축이다. 미분과 적분의 꼴로 물체의 운동을 기술하는 방법은 물리학과 학생이면 누구나 2학년 과정에서 배우는 내용이다.

우리는 둘 가운데 미분을 이용한 방법에 더 익숙하다. 현재 위치와 속도로부터 짧은 시간 뒤 미래의 정보를 알아내는 뉴턴의 운동방정식의 세계관이다. 반면 적분 꼴의 고전역학에서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전체 시간 경로에 대해 어떤 양을 적분한 것(작용, action)의 극값을 구하게 된다. 고전역학의 적분 꼴 방법의 결과로 얻어진 답은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경로 전체다.

우리 지구인이 시간 축을 따라 터벅터벅 한발씩 앞으로 걸음을 내딛는 방식에 익숙하다면, <네 인생의 이야기> 속 외계인은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의 전체 경로를 첫 걸음을 떼기 전에 이미 알고 있는 존재다. 외계인이 보는 세상에서는 미래도 과거처럼 딱 하나의 외길로 이미 결정되어 주어져 있는 형태로 보이게 된다. <네 인생의 이야기>의 주인공인 지구인 언어학자는 외계인 언어를 배워 적분 꼴 세계관을 습득하고, 미래도 과거처럼 이미 알고 있는 인식의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단편집의 다른 소설 <바빌론의 탑>에서의 중심 질문은 바로 “만약 천동설이 진리라면?”이다. 우주의 중심에 있는 지구에서 하늘을 향해 계속 오르면 우리가 보는 행성과 태양의 움직임은 어떤 모습일지, 그리고 천동설에서 상상한 우주 가장자리 둥근 지붕 천구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지를 작가는 상상한다.

단편 <영으로 나누면>도 재밌다. 수학에서 어떤 수를 영으로 나누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만약 0으로 나누는 것이 허락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예를 들어, 2를 0으로 나눈 값을 x라고 부르면 2/0 = x가 되고, 양변에 0을 곱하면 2 = 0이라는 엉뚱한 식을 얻게 된다. 즉, 어떤 숫자를 0으로 나누는 것이 허락되는 세계에서는 2와 0은 같은 값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영으로 나누면>에서 작가가 묻는 중심 질문이 바로 이 이야기다. 어떤 숫자를 영으로 나누는 것이 논리적으로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명징하게 깨달은 가상 세계 수학자의 고민을 작가는 소설로 풀어냈다.

테드 창의 단편집에 수록된 다른 단편 <일흔 두 글자>는 <네 인생의 이야기>와 함께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단편이다. 언어가 가진 마술적인 힘, 생물학의 전성설, 열역학, 그리고 재귀의 개념 등이 적절히 연결되어 소설의 줄거리가 이어진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차티스트 운동이 일어난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영국이다.

그런데, 가만히 읽다보면 실제의 19세기 영국이 아니다. 실제 현실과 달리, 지금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진 당대의 과학 지식이 ‘진리’인 가상의 세상이다. 일종의 평행 우주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현미경의 개발로 난자와 정자의 존재는 실제로도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이 이뤄진 다음 태아가 발생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이해는 현대의 이해와 무척 달랐다.

한동안 과학자들 사이에는 남성 정자의 내부에 아주 작은 크기의 인간인 호문쿨루스(homunculus)가 담겨있다는 주장이 실제로도 있었다. 정자 속 작은 인간인 호문쿨루스가 난자와 결합해 실제 크기의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 발생의 과정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이론이 바로 전성설(前成說)이다.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는 모두 8편의 단편이 담겨있다. 영화 ‘컨택트’로도 만들어져 유명한 ‘네 인생의 이야기’도 하나다. /사진=출판사 엘리(북하우스)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는 모두 8편의 단편이 담겨있다. 영화 ‘컨택트’로도 만들어져 유명한 ‘네 인생의 이야기’도 하나다. /사진=출판사 엘리(북하우스)

인간의 모습이 수정 이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지금의 기준으로는 일종의 유사과학에 해당한다. 정자는 형상을, 난자는 질료를 태아에게 제공한다는 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 철학도 떠오르는 주장이다. 테드 창은 이 단편에서 “만약 전성설이 진리라면?”이라는 질문을 중심축으로 해서 소설을 진행시킨다. 소설에 그려진 19세기 영국은 호문쿨루스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과학적 진리인, 가상의 평행 우주 안 세상이다.

작가의 상상이 자못 흥미롭다. 한 인간 남성의 정자에서 호문쿨루스를 얻고, 이를 실제 인간의 크기와 비슷하게 키워내는 과정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이렇게 배양한 호몬쿨루스의 정자를 다시 또 채취해서 또다시 그 안의 호몬쿨루스를 볼 수 있게 된다. 소설 속 가상 세상의 과학자들은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다가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치게 된다.

인간의 남성 정자로 호몬쿨루스를 재귀적으로 배양하는 과정을 이어가 보니, 앞으로 여섯 번째 이후 세대의 호몬쿨루스의 정자에는 호몬쿨루스가 들어있지 않다는 발견이다. 즉, 앞으로 여섯 세대가 지나면, 인류가 결국 모두 멸망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인류의 종말을 미리 알게 된 과학자들은 적절한 마술적 주문이 물리적인 힘을 갖게 된다는 ‘명명학’을 이용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소설 속 가상 세계의 명명학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해 있다. 물질로 작은 인형을 만든 뒤 적당한 주문을 글로 적어 인형의 슬롯에 삽입하면 인형이 스스로 작동하는 것이 가능한 세상이다. 이러한 자동인형은 주변의 열에너지를 유용한 일로 바꿀 수 있어서, 작동을 계속하면 인형 주변의 온도가 낮아진다는 이야기도 소설에 적혀있다. 즉, 소설 속 가상 세상에서는 엔트로피 증가를 이야기하는 열역학 제2법칙도 성립하지 않는다.

명명학을 잘 이용해서 만약 ‘재귀’가 가능하도록 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재귀의 주문을 호몬쿨루스에 각인하게 되면, 이렇게 탄생한 호몬쿨루스도 ‘재귀’가 가능하게 되어 세대를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된다. 즉, 전성설, 명명학, 그리고 재귀를 이용해 인류 종말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소설의 결말에서 작가가 명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인류의 영속이 가능한 재귀적인 개체 발생의 암호는 우리 몸 안 세포에 들어있는 실제 인간의 DNA에 해당한다. DNA에 담긴 정보가 바로 명명학의 주문인 셈이다.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테드 창은 필자와 나이가 동갑이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작가의 과학적 상상의 능력이 무척 부러웠다. 같은 것을 배워도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상상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과학은 시작이 주어지면 끝까지 자동으로 이어지는 자동 기계 장치가 아니다. 현실 과학 연구가 진행되는 매 단계마다 상상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나라의 과학 교육이 과연 학생들에게 얼마나 깊고 넓은 상상을 허락하고 있는지,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