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갈 것”이라던 프리고진, 그리고 푸틴의 운명 [오인경의 그·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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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갈 것”이라던 프리고진, 그리고 푸틴의 운명 [오인경의 그·말·이]
  • 오인경 후마니타스 이코노미스트
  • 승인 2023.07.03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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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반란 나섰던 프리고진, 결국 벨라루스 망명길 선택… 푸틴 정권에 상당한 균열 촉발

인공지능, 로봇, 생명공학, 양자물리학 등등 온갖 첨단 기술문명이 발전을 거듭하는 21세기에 와서도 구태의연한 과거의 모습을 답습하는 분야가 더러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전쟁’이다. 그나마 문명의 발달 덕분에 대규모의 전쟁은 지난 세기말과 금세기에 접어들면서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1,2차 세계대전을 제외한다면 대규모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참혹한 전쟁은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등 손으로 꼽을 정도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사정은 완전히 뒤바뀐다. 인류의 역사가 곧 전쟁의 역사나 다름없을 정도로 전쟁이 잦았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사진=이미지투데이

전쟁이 드물어진 세상을 살면서도 우리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생활마저 곧잘 전쟁에 비유하길 즐긴다. 주식시장도 전쟁이요, 출퇴근과 직장생활도 전쟁에 비유하며, 마케팅도 전쟁에 비유한다. 심지어는 우리의 삶 그 자체를 전쟁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독일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기나긴 전투’로 비유하기도 했다.

“온갖 협잡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이 세계에서 사람은 강철같은 의지를, 운명의 일격을 막아낼 갑옷을, 사람들을 밀치며 나아가기 위한 무기를 지녀야 한다. 인생은 하나의 기나긴 전투다. 인생의 매 단계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볼테르가 정확히 말했듯이, 우리가 성공할 때는 칼날 바로 끝에서 성공하며, 우리가 죽을 때는 손에 든 그 무기로 죽는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여록과 보유》

쇼펜하우어. /사진=위키백과
쇼펜하우어. /사진=위키백과

전쟁 한번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독일 철학자가 인생을 저토록 처절한 전쟁에 비유한 걸 보면 숱한 전쟁터를 일상처럼 누비고 다닌 인물들은 도대체 삶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전 세계의 이목을 단번에 자신에게로 집중시킨 바그너 그룹의 수장 프리고진 같은 인물이라면? 그는 이미 9년 전에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강제로 병합할 때부터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낸 적이 있었다. 러시아 특수부대 출신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바그너 용병 조직은 그 직후부터 온갖 세계적인 내전과 분쟁에 깊숙이 개입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이권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참혹한 내전이 벌어지는 곳이야말로 프리고진의 주된 활동 근거지이자 일터였던 셈이다. 시리아, 리비아, 수단, 말리, 콩고, 모잠비크 등등 프리고진이 이끄는 리비아 용병부대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은 드물었다. 지난해 2월에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어쩌면 프리고진에게는 다시금 찾아온 최적의 활동무대였는지도 모른다.

바그너 그룹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초기부터 대규모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등 악명을 떨쳤다. 최근에는 바흐무트 전투에서 격전을 치른 끝에 승리하는 등 러시아 정규군 이상의 전투력을 과시했다. 그 덕분에 한갓 민간 군사 기업에 불과했던 바그너 그룹은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확대됐다. 프리고진은 어느새 러시아 국방장관과 총참모장을 공개 비난할 정도로 발언권이 커져갔다. 그는 마침내 자신을 견제하려는 군 수뇌부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그 사실이 들통나자 돌연 군대를 이끌고 모스크바로 진군하는 무장 반란까지 일으켰다. 시시각각으로 전해지는 반란군의 진격 소식 때문에 온 세계가 긴장하던 순간, 모스크바 인근 200까지 진격했던 무장 반란군은 돌연 ‘타협’을 선택하고 군대를 되돌린다. 프리고진은 결국 벨라루스로 망명한다. “우리는 끝까지 갈 준비가 됐다”라던 반란 초기의 호언장담에 비한다면 너무나 뜻밖의 귀결이 아닐 수 없다.

프리고진. /사진=위키백과
프리고진. /사진=위키백과

프리고진의 군사 반란은 23년 동안 절대권력을 휘둘러 온 푸틴 정권에 상당한 균열을 일으켰다. 절대권력은 언젠가는 붕괴하기 마련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에도 내란으로 어지러운 적이 있었다. 로마의 원로원이 갈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파견했던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서둘러 로마로 복귀하라고 연신 재촉했던 이유도 권력의 사유화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부대를 해산시킬 것이냐 아니면 자신을 견제하려는 로마의 원로원파에 맞서 싸우느냐의 갈림길에서 결국 후자를 택한다. 그가 루비콘강을 건너면서 남긴 말이 걸작이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카이사르는 탁월한 전략과 용맹함을 바탕으로 전광석화처럼 로마로 진격했다. 카이사르와의 맞대결이 두려웠던 폼페이우스는 쫓기듯 로마를 떠났고, 끝내 이집트에서 허망하게 죽고 만다. 무장 반란에 성공한 끝에 권력을 장악한 카이사르는 끝내 스스로를 독재관의 지위까지 끌어올렸지만, 브루투스를 비롯한 공화정 수호파의 반란에 희생되고 만다. 카이사르의 죽음과 함께 로마의 공화정도 이내 막을 내리고 만다.

카이사르의 암살. /사진=위키백과
카이사르의 암살. /사진=위키백과

카이사르처럼 자신과 조국을 동시에 저울에 올려놓고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를 놓고 갈등을 겪는 일은 흔치 않다. 그런 기회는 극소수에게만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런 선택의 순간에 자기 자신을 조국보다 더 중시하여 끝내 조국을 버리는 경우는 더더욱 흔치 않다. 왜냐하면 대개 조국을 버리는 것이 결국 자신을 버리는 결과를 빚기 쉽기 때문이다. 카이사르 말고도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조국 로마를 향해 무장한 군대를 몰아간 인물은 또 있었다. 그의 이름은 코리올라누스였다. 이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도 비극적이면서도 인간 심리의 미묘한 부분까지 다시금 헤아리게 만드는 아주 희귀한 본보기라는 점에서 특히 많은 사람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그 인물의 이야기를 그린 희곡 『코리올라누스』로 자신의 ‘최후의 비극’을 장식했고, 베토벤은 <코리올란 서곡>을 작곡했으며, T.S.엘리엇은 그 유명한 『황무지』에 이 인물의 이야기를 기꺼이 담았을 정도였다.

​코리올라누스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났지만 어릴 때부터 강인한 체력과 용맹을 뽐내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전사들의 모범으로 우뚝 선 그는 이민족들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끝에 집정관 후보로 출마했다. 17년 동안 로마를 위해 싸우다가 입은 상처들이 가장 큰 밑천이었다. 그런데 정작 선거일에 로마 시민들은 그에게 질투와 두려움을 느끼고 등을 돌린다. 코리올라누스도 민중의 배반에 격분했다. 그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로마 민중과 귀족들 사이에 식량 배분 문제로 갈등이 불거졌고, 코리올라누스는 로마 민중을 격렬하게 비난하며 반감을 사게 된다. 로마의 호민관들은 민중을 무시하고 배반한 코리올라누스를 끝내 사형에 처하기로 결정한다. 코리올라누스는 귀족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기고 재판받을 기회를 얻지만 끝내 유죄판결을 받고 추방당한다.

​코리올라누스는 엄청난 분노에 휩싸인 채 부하 서넛만 데리고 로마를 떠난다. 그는 오로지 로마에 복수할 생각뿐이었다. 그는 곧바로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볼스키를 찾아간다. 그는 곧 볼스키 군대를 지휘하는 총지휘관이 되어 로마로 쳐들어갔다. 그가 로마에서 12마일 떨어진 도시를 점령하자 민중은 두려움에 떨며 그에게 내린 추방 명령을 취소하고 그를 로마로 돌아오게 하자고 요청한다. 이번에는 로마 귀족들이 그걸 반대했다. 그러자 코리올라누스는 격분해서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5마일 앞둔 곳에 진을 친다. 폭풍우처럼 다가오는 위기를 느낀 로마는 온갖 사절단을 보내 코리올라누스를 설득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때 로마의 부녀자들이 코리올라누스의 어머니와 며느리와 손자들을 데리고 코리올라누스를 찾아가자고 설득한다. 코리올라누스는 자신을 설득하러 찾아온 어머니의 간곡한 설득에도 꿈쩍하지 않는다. 마침내 어머니가 아들의 발밑에 엎드리고 아내와 자식들도 따라 했다.

코리올라누스에게 간청하는 어머니. /사진=위키백과
코리올라누스에게 간청하는 어머니. /사진=위키백과

“오, 어머니, 이게 웬일이십니까?”

“어머니께서 이기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승리는 로마를 위해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저에게는 파멸입니다. 그 무엇에도 지지 않던 어머니의 아들을 마침내 보기 좋게 꺾어놓으셨습니다. 저는 이제 물러가겠습니다.”

코리올라누스가 군대를 되돌려 안티움으로 돌아오자, 오래전부터 그를 미워하고 시기하던 장군이 그를 없앨 음모를 꾸몄다. 음모에 가담한 자들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 코리올라누스에게 달려들어 그 자리에서 그를 죽여버리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전해 들은 로마는 어떤 슬픔이나 존경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한다.

코리올라누스에 대한 전기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담겨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코리올라누스의 성격상 결함’에 대해 따끔한 지적을 잊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은 코리올라누스의 사교적이지 못하고 교만하고 고집스러운 성격에 있었다. 이런 성격의 사람들 눈에는 많은 사람이 못마땅해 보인다. 또한 그 성격이 명예욕과 결합하면 화를 잘 내는 무자비한 사람이 된다”. 플루타르코스가 코리올라누스의 전기에서 결론 삼아 지적하는 다음 대목은 한 나라의 지도자뿐만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일반인들에게도 얼마든지 적용이 가능한 얘기로 들린다.

​사람들은 평판에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하면서도 다른 이들 말에 무척 신경 쓴다. 그리고 좋은 평을 듣지 못하면 화를 낸다. 메텔루스, 아리스티데스, 에파메이논다스도 모두 평판에 무관심했는데 그것은 세상이 자신에게 무엇을 주든 빼앗든 전혀 개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은 몇 차례나 추방되거나 선거에서 떨어졌어도,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아도 조국에 대해 앙심을 품지는 않았다. 그리고 민중이 자신들에게 내린 처벌을 후회하고 다시 불렀을 때에는 곧바로 돌아와 민중과 화해했다. 대중의 평가에 크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들이 나쁜 평가를 해도 쉽사리 복수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영예로운 자리에 앉혀주지 않는다고 앙심을 품는 것은, 오직 영예를 얻으려고 하는 탐욕에서 나오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코리올라누스 편>

​T. S. 엘리엇은 <황무지>에 담은 코리올라누스에 대해 ‘스스로의 감방에 갇힌 인간’이라고 표현했다. 참으로 명쾌한 진단이 아닐 수 없다. 코리올라누스는 한때 로마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으로 활약했지만, 자신이 ‘집정관’에 뽑히지 못한 때부터 ‘민중들’을 미워하기 시작하더니 결국엔 ‘자신’을 위해 조국까지 배반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조국인 로마를 사랑했으나, 그보다는 자신의 명예를 훨씬 더 중시했음이 틀림없다. 오로지 자신의 입장만을 가장 중시하고 앞세우는 인간이야말로 ‘오만의 극치’가 아니고 무엇일까. 코리올라누스는 바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 행동하다가 스스로 몰락했고, 세월이 그토록 오래 지났어도 두고두고 ‘자기애의 화신’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극적인 드라마가 쓰이다 만 듯한 느낌을 주는 프리고진과 푸틴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전개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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