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경제전쟁 사이에 낀 한국 ‘투키디데스의 함정’ [오인경의 그·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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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경제전쟁 사이에 낀 한국 ‘투키디데스의 함정’ [오인경의 그·말·이]
  • 오인경 후마니타스 이코노미스트
  • 승인 2023.06.08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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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대규모 생산 설비 구축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딜레마

“내가 여기에 쓰는 역사는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역사의 반복 또는 적어도 반복에 가까운 것을 대비하려는 사람이라면, 이 글에서 충분한 도움을 얻을 것이다. 이는 대중의 찬사를 받고자 쓰는 문학이 아니라, 영원한 지식의 보고로 남기 위해 이루어진 사실의 집적이다.” -투키디데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였던 투키디데스는 사람의 행동 동기를 세 가지로 파악했다. 부의 추구와 명예욕과 공포로부터 도피하려는 동기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원망(願望)을 실현하기 위해 사람은 힘을 얻으려 한다고 보았다. 사람이 힘의 획득을 노리는 한 다툼은 끊이지 않고, 사람의 안전은 언제나 위협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리고 그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욱 강한 힘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그는 체험했다. 이러한 끊기 어려운 악순환은 사람과 사람 사이뿐 아니라 국가 사이에서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그는 심각한 비관론자가 되었다.

세상을 비관한 그가 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써서 후세에 남기려고 했을까? 그것은 이러한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역사의 흐름을 지식으로 파악한 사람은 이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세상을 보다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능히 계몽할 수 있다고 믿었다.

투키디데스. /사진=위키백과
투키디데스. /사진=위키백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벌어진 당대 최대의 전쟁이었다. 세 차례에 걸친 페르시아와의 대규모 전쟁에서 극적으로 승리한 아테네는 나날이 강성해졌고 점점 더 위세를 떨쳤다. 그런 아테네를 견제하기 위해 스파르타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다. 27년간이나 지속된 그 전쟁은 결국 아테네의 항복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스파르타의 승리 또한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머잖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까마득한 고대의 역사가인 투키디데스가 오늘날 새롭게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른바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용어 때문이다. 이 말은 2001년 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9·11 테러 당시 극적으로 재조명을 받은 문명사 분야의 명저인 『문명의 충돌』(1996)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이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그레이엄 앨리슨의 《불가피한 전쟁(Destined for War, 2017)》에서 더욱 구체화한 개념이다.

『문명의 충돌』을 쓴 새뮤얼 헌팅턴의 주장에 따르면, 문명의 핵심국들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경우가 아니면 직접적 군사 충돌은 상호 자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문명들의 세력 균형에 변화가 올 때, 핵심국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른바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새뮤얼 헌팅턴. /사진=위키백과
새뮤얼 헌팅턴. /사진=위키백과

투키디데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 문명 내부에서 아테네의 힘이 강성해졌을 때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서구 문명의 역사는 부상하는 강대국과 쇠락하는 강대국 사이에 벌어진 '헤게모니 전쟁의 역사다.상이한 문명에 속해 있으면서 부상하는 핵심국과 쇠락하는 핵심국 사이의 분쟁 촉발 정도는 이들 문명에 속한 국가들이 새로운 강대국의 부상 앞에서 견제를 추구하느냐 편승을 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시아 문명에서는 편승 현상이 더 지배적으로 나타나지만, 중국의 부상은 미국, 인도, 러시아 같은 다른 문명권의 국가들로 하여금 세력 균형을 도모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중에서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멸망한 이후 세계 최강국은 숨 가쁜 자리다툼을 이어왔다. 초거대 제국이 기나긴 세월 동안 확고부동한 초강대국으로 군림해 오다가 마침내 패망하고 말았으니 우후죽순 생겨난 신흥 강대국들의 도전이 얼마나 숨가쁘게 진행되었겠는가. 저명한 경제사학자인 찰스 P. 킨들버거는 『경제 강대국 흥망사 1500∼1990』이라는 책에서 바로 그 부분을 주도면밀하게 고찰한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로부터 시작해서 네덜란드와 영국을 거쳐 미국과 일본까지 강대국들의 흥망성쇠를 세밀하게 추적한다. 그 500년의 기간 동안 뚜렷한 리더가 존재하던 때도 있었고, 선두국가가 불확실한 때도 있었다. 그 책에서의 결론 또한 ‘투키디데스의 함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 과연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인가, 중국이 얼마만큼 빨리 미국을 제치고 전세계 선두국가로 올라설 것인가를 화두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오인경
/사진=오인경

세계 최강국 사이의 자리바꿈에서 전쟁이 없었던 유일한 예외라면 영국과 미국 사이에서 일어난 ‘배턴 터치’였다. 팍스 브리타니카에서 팍스 아메리카나로의 이행이 평화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은 바로 두 사회의 문화적 유대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는 그러한 종류의 유대감이 없다. 그 때문에 서구 문명에서 중국으로 패권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군사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을 크게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1995년부터 2017년까지 미국 하버드대학교 벨퍼 국제문제연구소장을 지낸 그레이엄 앨리슨은 앞서 언급한 책 《불가피한 전쟁(Destined for War)》에서 미국과 중국이 결국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져 서로 원치 않는 전쟁으로 치닫고 있다고 분석했다. 고대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의 상황이야말로 현재의 미·중 관계와 판박이라는 것이다. 앨리슨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 500년간 지구에서 발생한 투키디데스 함정은 16차례였고, 이 중 12차례가 전면전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1979년에 성사된 미·중 수교의 주역인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마저도 머잖아 미·중 사이의 전쟁 가능성을 공공연히 주장할 정도이니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피하기가 쉽지는 않을 모양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최근까지 진행 중인 수많은 지역적 분쟁들은 옛 소련 연방의 해체에 따른 탈냉전 시대의 도래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강대국을 중심으로 이념에 따라 맺어진 제휴 관계가 극적으로 사라지고 문화와 문명을 축으로 제휴 관계가 재편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경계선이 문화적 경계선 곧 민족적, 종교적, 문명적 경계선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급속도로 바뀌었다. 유럽의 많은 국가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NATO와 EU 가입 문제를 결정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다짜고짜 무력으로 침공한 최근의 사태는 제휴 관계의 핵심이 이념에서 문명으로 옮겨간 영향의 극단적인 사례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사진=이미지투데이
우크라이나 전쟁. /사진=이미지투데이

탈냉전 이후의 문명과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특히 중국의 역할이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는 점은 안보와 경제 모두에서 직접적인 영향권에 놓인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도 여간 심각한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중국 정부는 중국 본토를 중국 문명의 핵심국으로 이해하고 다른 모든 중국인 공동체가 이 핵심국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홍콩 사태야말로 이런 생각이 현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케이스였다.

몇 해 전부터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한 미·중 무역전쟁은 소규모의 관세 전쟁에서부터 시작하여 대규모 관세 폭탄을 주고받는 단계를 지나 ‘화웨이 사태’로까지 확산일로를 걷다가 잠시 멈춰서는 듯하더니 어느새 반도체 분쟁으로 광범위하게 확산하는 추세다. 남중국해의 영유권 주장을 둘러싼 갈등, 홍콩과 대만의 지위를 둘러싼 ‘하나의 중국 정책’에 대한 미국의 입장, 티베트와 위구르 자치구에 대한 인권 문제 등도 미·중 간에 잠재된 폭발력 있는 갈등 요소들이다. 미·중 간의 갈등은 당장에 전쟁으로까지 확전될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는다. 중국의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직 미국과 상당한 격차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또다시 ‘투키디데스의 함정’ 앞에서 두 나라가 건곤일척의 대전쟁을 벌이느냐 마느냐로 심각한 양상을 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중 경제전쟁. /이미지=이미지투데이
미중 경제전쟁. /이미지=이미지투데이

전 세계를 둘러보면 수많은 문제가 여전히 미해결인 채 남아 있고, 어떤 문제들은 처음 등장할 때만 하더라도 심각한 위기로 대두되다가(쿠바 위기 등)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이내 사그라지기도 한다. 또한 과거부터 오랫동안 잠재된 갈등들이 기나긴 잠복 기간을 거쳐 일순간 거대한 분노로 표출되는 경우도 더러 나타난다. 가장 최근에 일어났던 홍콩의 격렬한 반중 시위는 100년 동안의 서구화를 겪은 사회가 아무런 갈등도 없이 중국 본토 문명으로 재흡수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새뮤얼 헌팅턴이 제시한 ‘문명끼리의 충돌 관점’은 고작(?) 수십 년 동안만 존재했던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얼마만큼 허약한 기반 위에 존재했던가를 새삼 되짚어보게 만드는 한편, 1000년 혹은 2000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 동안에 걸쳐 단단하게 형성된 문명이라는 범주가 얼마만큼 강렬한 힘을 비축한 채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힘을 발휘하는가를 다시금 깨닫게 만든다. 또한 수많은 역사가가 예견했듯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문명은 시간이 경과하는 동안에 축적되는 인구 증가 및 인구 구성의 변화, 경제력의 차이, 군사력의 변화 등에 따라 갈등과 충돌을 겪으면서 차츰 쇠락한다는 사실도 다시금 깨닫게 만든다.

실로 오랫동안 미국이 주도해 온 서구 문명도 차츰 쇠락하고 나면 멀지 않아서 아시아 문명, 그 가운데서도 중국 문명이 지구 최강의 경제력과 인구와 여러 친족국(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을 대동한 채 새로운 질서 재편 과정을 밟아나갈 가능성이 매우 커 보인다. 수천 년 동안 유교 문명권에 속해 있으면서 중국과 접촉했던 우리나라는 과연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미국의 핵심 우방으로 계속 남게 될까. 아니면 끝내 중국 문명으로 재차 복귀할까.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그 누가 대답할 수 있을까. 그러나 새뮤얼 헌팅턴의 책을 펼치면 우리나라가 언젠가는 그런 어려운 선택지 앞에서 의사결정을 강요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중국에 대규모의 생산 설비를 구축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미 그런 딜레마에 빠져들고 있다. 오랫동안 서구식 합리주의와 민주주의에 적응해 온 다른 문명들은 아직도 민주적인 선거 절차와 지도자 선출 과정조차 경험하지 못한 권위주의적인 중국 문명과 어떤 갈등과 충돌을 빚을까. 과연 서구 문명은 언제쯤 다른 문명에 자신의 주도권을 내놓을까? 30년 후? 100년 후?

모든 문명의 역사에서 적어도 한 번은, 그리고 대개는 여러 번 역사의 막을 내린다. 문명의 보편 국가가 등장하면 그 문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토인비가 말한 대로 '영속성의 망상'에 눈이 멀어 자기네 문명이 인류 사회의 최종 형태라는 명제를 신봉하게 된다. 로마 제국이 그러했고 압바스 왕조가 그러했으며, 무굴 제국과 오스만 제국도 다를 바 없었다.보편 국가에 거주하는 국민들은 그 보편 국가를 황야의 하룻밤 거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 인간의 궁극적 목표점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절정기의 대영 제국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1897년의 영국 중산층은 역사는 종착역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그들은 이 역사의 종말이 자신들에게 베풀어 준 영구 불멸한 열락의 상태를 자축해야 할 이유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역사가 궁극점에 이르렀다고 전제하는 사회는 대체로 몰락기로 접어든 사회이다.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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