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이정재 저녁 식사에 춤추는 주가 ‘갈비 효과’? [오인경의 그·말·이]
상태바
한동훈·이정재 저녁 식사에 춤추는 주가 ‘갈비 효과’? [오인경의 그·말·이]
  • 오인경 후마니타스 이코노미스트
  • 승인 2023.11.29 09: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사진=이미지투데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사진=이미지투데이

현직 장관과 유명 배우가 저녁 식사를 함께한 모습이 증시에서 연일 화제다. 이 두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종목들이 느닷없이 주가가 높이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현직 법무부 장관과 유명 배우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 만큼 낯익은 인물이 틀림없다. 외관상으로만 본다면 그 두 사람은 전혀 어울릴 일이 없을 듯하다. 알고 보니 그 두 사람은 고교 동기동창인데다가 최근 강남의 한 갈빗집에서 식사를 함께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졌다. 정작 가장 놀라운 건 두 사람이 식사를 마친 뒤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증시에 미친 엄청난 파급효과다. 일반적인 투자자들이 주식시장에서 원하는 수익률을 얻기는 얼마나 힘이 드는가. 다방면으로 숙고한 끝에 고르고 골라 투자한 종목들이라고 해도 여간해서는 원하는 수익률을 얻기 어렵다. 그런데 바닥권을 헤매던 종목이 단 이틀 만에 70% 넘게 수직 상승한다면 이건 정말로 엄청난 수익률이다. 현직 장관과 유명 배우가 찍은 사진 한 장이 이토록 놀라운 주가 상승을 끌어낸 까닭은 과연 무엇인가? 도대체 이걸 무슨 효과라고 불러야 좋을까. 나비 효과? 아니면 갈비 효과?

/그래픽=오인경
/그래픽=오인경

시장은 침소봉대를 좋아한다는 말은 대체로 진리에 가깝다. 일상적인 회사 실적의 변동을 걸핏하면 큼지막한 뉴스로 과장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단지 흥미나 열정이 조금만 떨어져도 주가가 터무니없이 낮은 수준으로 하락하는 것도 시장의 속성이다. 이와 반대로 전혀 낯선 그림을 마주했을 때 시장은 격렬하게 반응한다. 올해 여름에 2차전지 테마주가 맹렬하게 타오른 끝에 마침내 인기가 식어갈 무렵, 느닷없이 나타난 초전도체 테마주가 엄청난 거래량과 함께 주가 폭등을 불러일으킨 것도 ‘마이스너 효과’라는 특이한 물리적 특성을 담은 동영상이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윤석열 정권 출범 때부터 이미 정권의 2인자로 공인받은 실세 장관이 유명 톱스타 배우와 함께 맛있는 갈빗집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즐기고 난 직후에 찍은 사진 한 장은 상상을 뛰어넘는 이색적인 풍경에 목말라하는 대중들에게 분명 놀라운 자극을 던져주는 그림이 틀림없다.

배우 이정재는 <오징어 게임>으로 이미 세계적인 스타로 올라선 인물이다. 전 세계 수십억 인구 가운데 한동훈을 아는 사람보다는 이정재를 아는 사람이 수백 배 혹은 수천 배는 많을 것이다. 그는 <모래시계> <관상> <암살> <신과 함께>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서 이미 톱스타로서 확고한 지위를 누려온 배우다. 그런 기반 위에서 다시 한번 넷플릭스 역사상 유례가 없는 빅히트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전 세계인들의 이목을 사로잡았으니, 그의 위상은 어느새 대한민국 문화 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로까지 격상된 느낌마저 든다. 그는 2년 전부터 부산 엑스포 ‘공식 1호’ 홍보대사까지 떠맡고 있다. 그러니 윤석열 정권의 2인자라는 실세 법무부 장관마저도 자신의 동기동창 배우를 자신보다 더 유명한 사람으로 소개할 수밖에 없었겠다 싶다.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한류 드라마의 위상을 단번에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오징어 게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가 묘파했던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특성이 놀랍도록 치밀하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드라마가 전 세계인에게 그토록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게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호모 루덴스’
‘호모 루덴스’

사실 인류는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인류는 그리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게 밝혀졌고,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인류를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라고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인간의 본질을 도구를 사용하고 만들 줄 아는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관은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주장했는데,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훌륭한 문장이 가득한 그의 책 속에 담긴 설명은 이렇다.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한 세기가 흘렀는데 이제서야 우리는 그것이 야기한 심층적인 동요를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그것이 산업에 일으킨 혁명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조차 뒤집어 놓았다.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른다. 새로운 감정들이 개화하고 있다. 수천 년 후에 과거를 되돌아보고 그 주요한 선들만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면, 전쟁과 혁명들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아직 기억한다고 해도 별것 아니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증기기관 그리고 거기에 수반되는 각종 발명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가 청동이나 석기(石器)에 대해 말하듯이 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한 시대를 정의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가 모든 오만에서 벗어나 인간종을 정의하기 위해 역사시대와 선사시대가 우리에게 인간과 지성의 항구적인 특성으로 제시하는 것에 엄밀히 머물기로 한다면, 우리는 인간을 아마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 말하지 않고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앙리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중에서

앙리 베르그송 /이미지=위키백과
앙리 베르그송 /이미지=위키백과

​우리의 일상생활을 잠깐만 둘러보더라도 우리는 이미 수많은 도구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신체 일부처럼 온종일 꼭 움켜쥐고 다니는 스마트폰 하나만 보더라도 그렇다. 현대인들은 원시인들이 감히 상상도 못 했던 ‘마법의 도구’를 몸에 지니고 사는 셈이다. 인간은 이미 인공지능을 광범위한 분야에서 활용하기 시작했으며 디지털 ‘가상 인간’을 창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처럼 호모 사피엔스 또는 호모 파베르로 불리던 인간이 언제부턴가 호모 루덴스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호칭을 붙인 인물이 바로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였다.

인간과 동물에게 동시에 적용되면서 생각하기와 만들어내기처럼 중요한 제3의 기능이 있으니, 곧 놀이하기이다. 그리하여 나는 호모 파베르 바로 옆에,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수준으로,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를 인류 지칭 용어의 리스트에 등재시키고자 한다.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중에서

요한 하위징아가 놀이의 일반적 특징으로서 가장 먼저 내세운 건 자발성이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명령에 따른 놀이는 더는 놀이가 아니며, 기껏해야 놀이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아이와 동물은 재미있어서 놀이를 하는 것이며, 바로 거기에 그들의 자유가 깃들어 있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은 어떤가? 그 드라마에서는 놀이의 첫 번째 특징들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오징어 게임에 뛰어든 456명의 참가자는 (유일한 예외인 오일남 할아버지를 제외하면) 모두가 하나같이 막다른 골목에 내몰려 어쩔 수 없이 그 게임에 참가한다. 물론 그들은 문틈에 낀 초대장을 보고 자발적으로 그 게임에 참가하는 형식을 띠고 있지만, 진짜 속 사정은 전혀 다르다. 온 사방을 둘러봐도 희망이라고는 더 찾을 수 없을 때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 탈출구로 그 게임에 참가한다. 이토록 자발적이면서도 비자발적인 게임은 상상하기 어렵다. 또한 그들은 그 잔인한 게임을 중도에 그만둘 수도 있었지만, 끝끝내 자발적으로(!) 다시 그 게임을 계속하기 위해 되돌아온다. 이 얼마나 지독한 아이러니인가?

오징어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자신이 장기판 위의 말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눈다. 그들 스스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실상 그들은 VIP들의 놀이 본능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존재들이다. 영국의 사회비평가 존 러스킨이 말한 ‘가진 자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오징어 게임에서 너무 정곡을 찔렀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러스킨은 인류를 노동자의 종족과 놀이하는 종족으로 대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자는 땅을 갈고 물건을 만들고 집을 짓는 등 생활 필수품을 제공하는 자들이다. 반면에 후자는 일을 하지 않아 시간적 여유가 많으므로 레크리에이션을 필요로 하는데 노동자의 종족을 자신들의 가축으로 혹은 인형으로 혹은 죽음의 게임에 투입하는 졸로 여긴다는 것이다.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중에서

천진난만하던 어린 시절에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신나게 즐겼던 동네 골목길에서의 온갖 사소한 놀이가 2021년에 공개된 드라마 한 편으로 전 세계 사람들이 난리법석을 피울 만큼 세계적인 유행이 되어버린 이 기묘한 상황 때문에 많은 사람이 놀라움과 충격을 금치 못했었다. 이미 많은 분석가가 <오징어 게임>을 두고 한류 문화의 세계적 확산을 상징하는 대사건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0, 70년대 몹시 가난하고 못 살던 시대에 동네 꼬마 녀석들이라면 누구라도 즐겼던 그 천진난만한 게임들이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재연되는 모습은 처절하리만치 잔인한 생존게임으로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징어 게임의 이런 스토리라인이야말로 코로나 팬데믹 사태 등으로 점점 더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우리네 이웃들의 고달픈 삶에 대한 거대한 메타포였다.

​<오징어 게임>을 만든 황동혁 감독은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사회의 승자가 패자들의 시체 위에 서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 패자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가 오랜 세월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한 9부작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희비가 교차하는 호모 루덴스의 오래된 운명적 비극을 21세기에 또다시 명징하게 부각시킨 작품이 되었다.

주식시장에 참가하여 다양한 종목에 베팅하는 투자자들도 어쩌면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참가자들과 조금씩 닮았다. 그들은 처절한 생존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술래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는 어디로든 맹렬히 달려가야 한다. 투자자들은 주식시장이 때때로 비합리의 극치를 보이더라도 거기에 동조해야 할 때도 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지적한 대로 주식시장은 종종 미인대회의 속성을 지닐 때도 있기 때문이다. 훗날 언젠가 한동훈 장관이 대권후보로 등장할 날이 그려지고, <오징어 게임>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그 유명 배우가 후보와 함께 단상에 올라 대권후보의 손을 번쩍 치켜올리는 그림이 그려진다면, 동작 빠른 투자자들은 그 유명 배우의 연인이 경영하는 기업들을 재빨리 찾아낼 줄 알아야 하고,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투자자들이 그 기업에 대해 얼마만큼 비이성적인 열광을 나타낼지도 미리 그려볼 줄 알아야 하는 셈이다.

케인스 ‘일반이론’
케인스 ‘일반이론’

투기자가 기업의 착실한 흐름 위의 포말(泡沫)에 불과하다면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업이 투기의 소용돌이 속의 포말이 된다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일국의 자본의 발전이 도박장의 활동의 부산물이 된다면, 일이 제대로 되기는 힘들다. 월가 -그것은 장래의 수익이란 면에서 보아 가장 유리한 경로로 신 투자를 유도하는 것을 그 본래의 사회적 사명으로 하는 기관이라고 볼 수 있다- 가 달성한 성공을 자유방임(自由放任) 자본주의의 탁월한 승리 중의 하나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실제로 월가의 최우수 두뇌들은 그것과는 다른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고 하는 내 생각이 옳다면, 이 말은 놀랄 만한 말이 아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일반이론> 중에서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