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디폴트옵션’의 진짜 수혜자 [조수연의 그래픽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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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연금 디폴트옵션’의 진짜 수혜자 [조수연의 그래픽저널]
  • 조수연 편집위원(공정한금융투자연구소장)
  • 승인 2022.07.12 03: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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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수연 편집위원
/일러스트=조수연 편집위원

신정부가 이전 정부의 정책을 대부분 지우거나 대척점의 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이전 정부에서 추진하던 금융정책 하나가 조용하게 추진되고 있다. 바로 ‘퇴직연금 사전지정운용(디폴트옵션) 제도’인데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12월 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퇴직연금 디폴트 옵션 제도와 관련한 시행령 개정을 이번 달 5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했고, 오늘(12일)부터 시행한다고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디폴트옵션은 퇴직연금 가입자의 노후 대비 자산형성 지원을 위해 2019년 11월 범정부 인구정책 TF에서 주택연금 활성화와 함께 채택한 여러 가지 방안의 하나였다.

2021년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현황 통계. /자료=고용노동부
2021년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현황 통계. /자료=고용노동부

정책 도입 배경은 퇴직연금의 저조한 수익률이다. 지난해 퇴직연금 연수익률은 2%를 기록, 전년보다 크게 낮아졌다. 상품유형별 수익률은 원리금 보장형이 1.35%, 실적배당형은 6.42%를 기록했다. 전체적인 수익률이 낮은 이유는 원리금 보장형의 적립금 비중이 86.4%로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수익률이 높은 실적배당형의 적립 비중은 13.6%에 불과했다. 원리금 보장형에 가입자 운용 비중이 높은 이유는 가입자의 관심·시간 부족 등에 따른 소극적 투자 운용으로 관련 정책 보도자료에서 분석했다. 이전 정부 범부처 인구정책 TF는 저조한 퇴직연금 수익률이 국민의 노후 준비 자산형성 지원에 장애 요인이라고 지적하며 퇴직연금 제도 개선을 추진하기로 했었다.

퇴직연금 적립 규모는 지난해 말 기준 296조원이다. 국민연금 945조원의 31% 수준에 육박하는 막대한 규모로 성장했고, 포화 상태인 개인연금 적립금 160조원보다도 곧 2배에 육박할 전망이다. 퇴직연금은 가입률이 약 50%에 수준(2017년 기준)에 머물러 있고, 인구구조가 100세 시대가 되면서 노후 준비 중요성도 커지며 성장 가능성이 큰 금융시장이다. 아울러 퇴직연금은 한번 가입하면 퇴직할 때까지 장기적으로 적립할 가능성이 크고, 국민연금처럼 근로자 강제 가입이라는 제도적 특성도 있어 퇴직연금의 제도 개혁은 금융회사 경영에 중요성이 크다. 다만, 국민의 이해도는 높지 않다.

퇴직연금은 근로자의 회사가 최종 퇴직급여와 운용을 책임지는 확정급여형(DB)과 회사가 정기적으로 지급한 일정 퇴직급여를 근로자가 운용을 책임지는 확정기여형(DC), 그리고 퇴직자가 퇴직연금을 직접 관리하기 위한 개인형퇴직연금(IRP)으로 구분할 수 있다. 디폴트옵션은 투자 운용을 직접 해야 하지만 개인 사정상 운용을 할 수 없거나, 운용하지 않는 (디폴트) DC와 IRP 퇴직연금 가입자의 편의를 위한 장치이다. 일단 정부가 어떠한 내용을 시행하는지 확인해보자.

/자료=고용노동부
/자료=고용노동부

먼저 퇴직연금으로 투자할 금융상품을 금융회사(퇴직연금사업자)는 정부의 사전심의와 고용노동부 승인을 받아 사전지정운용(디폴트옵션) 방법으로 근로자 회사에 제시한다. 상품 유형은 원리금보장상품 100%, TDF를 포함한 펀드 상품 100%, 그리고 이 두 가지의 혼합이다. 그러면 근로자 회사와 근로자대표 동의를 받은 디폴트 옵션에서 근로자가 선택한다.

/자료=고용노동부
/자료=고용노동부

근로자가 일정 기간(약 6주 이내) 운용 지시를 하지 않는 때, 또는 근로자가 즉시 선택하는 경우 디폴트옵션을 적용한다. 운용현황과 수익률은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이 홈페이지에 공시하는 등 철저한 사후 관리가 시행된다.

/자료=한국은행
/자료=한국은행

디폴트옵션은 미국(2006년), 영국(2012년), 호주(2013년), 일본(2018년)에서 퇴직연금 제도에 도입했으며, 연평균 6~8%의 안정적 수익률 성과를 거두는 데 기여하고 있다. 디폴트옵션의 포트폴리오는 목표시점펀드(Target Date Fund, TDF), 장기가치 상승을 추구하는 자산배분펀드, MMF, 인프라 펀드 등이 법으로 지정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받는 것은 디폴트옵션 취지에 가장 부합한다는 TDF다. TDF는 은퇴지점을 지정한 펀드가 은퇴 시점에 가까울수록 위험자산 편입 비중을 자동 조절하는 펀드다. 미국은 2006년 디폴트 옵션 도입에 TDF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며 국내에서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디폴트옵션이 도입했다고 해서 퇴직연금 수익률이 제고될지는 의문이다. 법에 지정된 펀드 중 원리금보장상품과 MMF는 초단기 안정 상품이다. 나머지 TDF와 장기가치 추구형 펀드, 인프라 펀드는 근로자의 생애주기에 걸쳐 초장기 투자를 해야 한다. 이 제도는 근로자에게 안심하고 방관할 여유를 주는 대신, 금융회사에는 초장기간 금융회사(연금사업자)가 마음대로 운용하는 특권을 주는 것이 핵심이다. 퇴직연금은 근로기간인 10년에서 30년 동안 소득을 쌓고 재투자하며 위험을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단기 실적 위주 경영으로 불완전 판매, 불공정 영업행위 등 잦은 물의를 빚어온 국내 금융회사가 초장기 투자를 관리할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는지는 회의적이다. 이것이 어쩌면 현재 퇴직연금에서 원리금 보장형 비중이 가장 높은 이유일 수도 있다. 한국인의 보유자산 중 부동산 비중이 높은 것도 비슷한 이유라는 생각이다.

한 가지 사례가 금융투자협회 공시 7월 1일 기준 펀드매니저의 평균 운용 경력이 5년 6개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약 30년 동안 금융투자업계에 몸담았던 필자 경험에 펀드 가입 기간이 길어지면 잦은 펀드 교체, 금융회사의 경영진 교체 후 운용전략 변화 등에 펀드의 성과가 영향을 크게 받았다. 과거 1998년 대우채권 사태가 일어났을 때, 그 이전에 채권형 펀드의 실현 수익률이 고객 가입 시점 전망한 만기 수익률에서 크게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펀드를 판매하라고 지시한 본부 부서는 시장 위험이니 현장에서 잘 설득하라고 발뺌했다. 골치가 아픈 상황에 대우채권 부도로 펀드 환매가 중단되자 현장에서는 핑곗거리가 생긴 결과가 됐다. 이구동성으로 대우를 욕하며 이미 벌어진 운용 부실에 따른 신뢰 상실을 떼어 넘겼던 기억이 생생하다. 선진국 퇴직연금 시장에서는 무엇보다 뱅가드, 프랭클린 템플턴, 블랙록 등 글로벌 자산운용회사의 신뢰가 디폴트옵션 정착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국내 금융회사가 지금보다 상당히 높은 수준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디폴트옵션 도입에도 기대와는 달리 다수가 원리금보장상품이나 MMF를 선택할 가능성도 있다. 또한 해외펀드가 디폴트 옵션을 장악할 수 있다.

현재 300조, 미래 500조원으로 성장할 퇴직연금 시장은 연금사업자인 금융회사에는 놓칠 수 없는 시장이다. 게다가 디폴트옵션 도입이 원리금 보장형에서 실적배당 상품으로 퇴직연금 비중 전환을 촉진한다면 금융회사에서 퇴직연금 제도 개선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것임이 틀림없다. 금융회사의 수익원인 총비용부담률이 원리금 보장형보다 실적배당형이 높기 때문이다. 단 0.1% 비용 증가는 수천억 원의 수익을 금융회사에 선사한다. 이 때문에 디폴트옵션을 추진하는 동력은 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부분 근로자보다는 이윤 동기가 확실한 금융회사와 이들의 적극적 로비에 영향을 받은 금융당국, 정치권이 제공할 가능성이 크다. 따져보면 디폴트옵션에 연결된 금융산업의 먹이사슬은 아주 길다. 이들 주된 배역들의 동기와 면면을 고려하면 디폴트옵션이 근로자에게 수혜를 가져오기는 쉽지 않다. 왠지 과거 미래에셋의 인사이트펀드의 기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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