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뒤가 똑같은’ 영화와 시간물리학 [김범준의 세상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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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가 똑같은’ 영화와 시간물리학 [김범준의 세상물정]
  • 김범준 편집위원(성균관대 교수)
  • 승인 2020.09.28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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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테넷'의 한 장면.
영화 '테넷'의 한 장면.

영화 <테넷(TENET)>을 재밌게 봤다. 미래에 만들어져 현재의 시점에서 활동하는 영화 속 조직의 이름이기도 한 'TENET'은 묘한 특성이 있는 단어다. 철자를 앞이 아닌 뒤에서부터 시작해 거꾸로 적어도 정확히 같은 'TENET'이 된다. 주어진 대상에 어떤 변환을 했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을 때, 물리학에서는 이 대상이 대칭성이 있다고 말한다.

TENET은 앞뒤를 뒤집는 변환에 대해서 불변이니, 앞뒤 뒤집음 대칭성이 있고, 종이에 예쁘게 그린 원은 몇도의 각도를 돌려도 항상 같은 모습이어서 회전 대칭성이 있다. 영화를 관통하는 주된 주제가 바로 시간 되짚음(뒤집음) 대칭성에 대한 이야기다. 과거에서 미래를 향하는 시간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뒤집어, 미래에서 과거를 향해 거꾸로 시간이 흐르는 세상을 생각해본 놀라운 영화다.

◆ 웃을 수만 없는 ‘거꾸로 영화’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다룬 영화는 이전에도 많았지만, 미래에서 과거를 향해 시간의 역방향으로 진행하는 사람과 시간의 정방향으로 진행하는 사람이 만날 때 서로를 어떤 모습으로 볼지를 상상해본 영화는 거의 없었다. 시간의 정방향을 따라 진행하는 내가, 시간의 역방향을 따라 진행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 사람은 뒷걸음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시간의 역방향을 따라 진행하는 바로 그 사람이 시간의 정방향으로 진행하는 나를 보면, 그 사람은 거꾸로 내가 뒷걸음질치는 것을 본다.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영화에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고 한다. 152회 대덕과학포럼에서 <영화 TENET의 물리학>을 강의한 기초과학연구원의 장상현 박사가 김성수 감독의 2004년 단편 영화 ‘빽(Back)’이 모든 사람이 뒤로 걷는 세상에서 혼자서만 앞으로 걷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았다고 소개해주었다.

손에 들고 있는 유리컵을 떨어뜨리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서 여기저기로 유리조각들이 흩어진다. 이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고 거꾸로 틀면, 바닥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다시 모여 유리컵이 만들어지고, 공중으로 튀어 올라 손바닥위에 얌전히 올라서는 모습을 보게 된다. 유리조각이 다시 모여 유리컵이 되는 것도, 바닥에 있던 유리컵이 저절로 위로 올라 손바닥위로 올라서는 것도, 우리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현상이다.

동영상을 거꾸로 틀면, 우리 모두는 직관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영화를 거꾸로 틀면 사람들이 재밌어하며 웃음을 터뜨리지만, 물리학자라면 거꾸로 튼 영화를 보면서 웃을 수 없다고 리처드 파인만은 말했다. 물리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거꾸로 튼 영화를 보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이다.

이유가 있다. 물리학의 기본 법칙은 시간 되짚음 대칭성이 있어서, 얼마든지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튼 동영상 속 모습도 물리학의 기본법칙을 따른다. 그런데, 왜 우리는 거꾸로 튼 동영상을 보며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걸까?

시간물리학. /사진=픽사베이
시간물리학. /사진=픽사베이

지구가 작은 점으로 보일 정도로 아주 먼 거리에서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모습을 찍은 동영상을 상상해보자. 먼 북쪽 방향에서 찍은 동영상이라면, 시간이 흐르면서 지구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공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약 먼 남쪽 방향에서 찍은 동영상이라면, 지구는 거꾸로 시계 방향으로 돈다. 자, 이 동영상을 거꾸로 틀면 어떻게 보일까?

북쪽에서 찍은 동영상을 거꾸로 틀면 지구가 시계 방향으로 공전하는 모습을 보게 되어서, 남쪽에서 찍은 동영상을 시간의 정방향으로 틀었을 때와 같아 보인다. 즉, 우리는 멀리서 찍은 지구 공전 동영상을 재생할 때, 거꾸로 틀었는지, 아니면 원래 찍은 데로 보여주고 있는 지를 구별할 수 없다. 지구가 한 점으로 보이는 지구 공전 동영상은 거꾸로 틀어도 하나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 이상할 것 없는 ‘거꾸로 세상’

그런데 말이다. 만약 이 상상의 동영상의 장면을 확대하고 또 확대해서 지구 표면을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이제, 거꾸로 튼 동영상 속 사람들은 모두 뒷걸음으로 움직인다. 상상의 사고 실험이지만 결과가 흥미롭다.

지구가 한 점으로 보이는 동영상에서는 시간 되짚음 대칭성이 있어서 시간이 미래로 흐르는지 과거로 흐르는지 구별할 수 없는데, 같은 동영상의 부분을 확대하고 확대해 사람을 볼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시간 되짚음 대칭성이 깨져 과거와 미래가 달라 보인다. 멀리서 본 모습인지, 크게 확대해 세세한 정보를 볼 수 있는 모습인지에 따라서, 같은 동영상이어도 시간 되짚음 대칭성이 달라 보인다.

위에서 소개한 사고 실험에 대한 표준적인 해석이 있다. 바로, 볼츠만이 이야기한 엔트로피 증가와 시간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다. 살면서 우리는 많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커다란 세상을 주로 마주한다. 커다란 전체에는 엄청나게 많은 변수들(물리학에서는 이를 자유도라고 부른다)이 들어있다. 수많은 자유도를 가진 큰 세상에서는, 일어날 확률이 큰 사건이 관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엔트로피증가의 법칙의 자명한 의미다.

눈감고 여기저기 아무거나 집어 던지면 방을 점점 더 어지럽힐 수 있다.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는데 방이 깨끗이 정돈되는 일을 결코 볼 수 없는 이유는, 정돈된 상태에 해당하는 경우의 수가 어지럽혀진 상태에 해당하는 경우의 수보다 훨씬 작아서 어지럽혀진 상태가 관찰될 확률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일 뿐이다.

시간이 흐르면 방은 점점 더 어질러져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거시적인 세계에서는 시간 되짚음 대칭성이 깨져있어, 엔트로피가 늘 증가하는 시간의 정방향 흐름과 엔트로피가 줄어드는 시간의 역방향 흐름이 확실히 구별된다.

영화를 거꾸로 틀면 모두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세상이다. 잉크 방울을 구성하는 수많은 입자들이 물속으로 확산되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하지만, 자유도가 하나, 둘 정도인 세상은 다르다. 잉크 방울을 구성하는 입자가 딱 하나라면, 이 입자가 물속에서 여기저기 움직이는 모습은 동영상을 거꾸로 틀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거시적인 세계에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시간이 흐른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과 엔트로피 증가가 늘 동시에 함께 관찰된다고 해서,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을 보지만, 엔트로피를 줄인다고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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