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父 정신 의심"… 재벌가 '성년후견제' 유행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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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父 정신 의심"… 재벌가 '성년후견제' 유행하나
  • 김인수 기자
  • 승인 2020.08.03 14: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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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그룹 형제의 난 당시 신격호 여동생 “오빠의 정신 상태에 이상 증세”
한국테크놀로지 조양래 딸 “조현범 사장에 주식 승계 자발적 의사 의심”
조현범 vs 조현식·조희경·조희원 대결… '국민연금+소액주주' 어디로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고령이면 제정신 아니다? 재벌가 경영권 분쟁에서 ‘성년후견 청구’가 새로운 카드로 부각하는 모양새입니다. 2015년 롯데그룹에 이어 최근에는 한국타이어로 알려진 한국테크놀로지그룹에서도 성년후견 심판 청구가 제기돼 경영권 분쟁이 촉발된 것인데요. 그 형식이 이전 롯데그룹과 판박이로 흘러가고 있어 법원의 판단이 주목됩니다.

성년후견제도는 질병, 장애, 노령 등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처리 능력이 지속적으로 결여된 성인에게 후견인을 지정하는 제도인데요. 이 중 한정후견은 사무처리 능력이 부족한 상태를 인정해 일부분에 대해 후견인의 도움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지난달 30일 조양래 한국테크놀로지 회장을 상대로 조 회장의 장녀인 조희경 한국타이어나눔재단 이사장이 서울가정법원에 성년후견 감독인을 선임해 달라고 심판을 청구하면서 성년후견 다툼이 시작됐는데요. 조희경 이사장의 주장은 ‘동생인 조현범 사장에게 부친(조양래 회장)이 주식을 승계한 것이 자발적 의사에 의한 것인지 객관적 판단을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고령인 부친 조양래 회장의 판단에 의구심이 든다는 것인데요. 조양래 회장은 1937년생으로 올해 84세입니다.

이는 앞서 롯데그룹 형제의 난에서 나온 성년후견 청구와 닮은꼴인데요.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넷째 여동생 신정숙씨가 2015년 12월 18일 당시 94세였던 오빠(신격호)의 건강상태가 의심된다며 성견후견인을 지정해 줄 것을 서울가정법원에 요청한 것인데요.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고모인 신정숙씨가 테클을 걸고 나섰던 것입니다. 신 총괄회장이 치매증상으로 올바른 정신상태가 아니라는 것이 청구의 요지였습니다. 결국 법원은 2017년 6월 1일 성년후견인 지정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번 한국테크놀로지의 성년후견 신청은 주체가 롯데그룹의 여동생에서 한국테크콜로지에서는 딸로 바뀌었을 뿐 판박이입니다. 앞으로 재벌가의 경영권 분쟁에서 성년후견 심판이 유행이 될지 주목됩니다.

사진 왼쪽부터 조양래, 조현식, 조현범
사진 왼쪽부터 조양래, 조현식, 조현범

한국테크놀로지그룹에서 경영권 다툼이 붙은 것은 조양래 회장이 지난달 26일 차남인 조현범 사장에게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 전량(23.59%, 약 2400억원)을 블록딜(시간 외 대량매매) 방식으로 매각하면서부터인데요. 이로써 조현범 사장은 자신이 기존에 보유하던 지분 19.31%를 더해 총 42.90%로 단숨에 최대주주로 올라서며 그룹의 경영권 승계에 낙점을 받게 됩니다. 이전까지 조현범 사장의 지분(19.31%)은 형인 조현식 부회장의 지분(19.32%)과 거의 같았습니다.

이번 매매로 조현범 사장의 지분은 장남 조현식 부회장(19.32%), 장녀 조희경 이사장(0.83%), 차녀 조희원 (10.82%)씨 등 3남매의 지분을 합친 것(30.97%)보다 10% 이상 차이나 경영권 분쟁이 나도 뒤집히기 쉽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에 조희경 이사장이 성년후견 심판을 청구한 것인데요. 조 이사장은 “그동안 조 회장이 가지고 있던 신념이나 생각과 너무 다른 결정이 갑작스럽게 이뤄지는 모습을 보며 많은 분이 놀라고 당혹스러워했다”면서 “이러한 결정들이 조 회장이 건강한 정신 상태에서 자발적 의사에 의해 내려진 것인지 객관적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조 회장은 조 사장에게 주식 전부를 매각했는데, 그 직전까지 그런 계획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면서 “평소 주식을 공익재단 등 사회에 환원하고자 했으며, 사후에도 지속 가능한 재단의 운영방안을 고민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어 “기업 총수의 노령과 판단능력 부족을 이용해 밀실에서 몰래 이뤄지는 관행이 이어져서는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에 조양래 회장이 딸 조희경 이사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는데요. 성년후견을 청구한 바로 다음날인 31일 조 회장은 입장문을 내고 “정말 사랑하는 첫째 딸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고, 저야말로 저의 첫째 딸이 괜찮은 건지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라면서 “조현범 사장에게 약 15년간 실질적으로 경영을 맡겨왔고, 그 동안 좋은 성과를 만들어냈고 회사의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며 충분한 검증을 거쳤다고 판단해 이미 전부터 최대주주로 점찍어 두었다”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본인은) 나이에 비해 정말 건강하게 살고 있다”면서 “딸에게 경영권을 주겠다는 생각은 단 한 순간도 해 본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밝혔습니다. 이어 “만약 재단에 뜻이 있다면 이미 증여 받은 본인 돈으로 하면 될 것”이라면서 “제 개인 재산을 공익활동 등 사회에 환원하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있고, 향후 그렇게 할 방법을 찾고 있다. 그 방법에 대해서는 제가 고민해서 앞으로 결정할 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조양래 회장의 이번 차남 조현범 사장에게로의 지분 승계는 롯데그룹이나 한진그룹의 전철 밟지 않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됩니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경우 후계자를 명확히 정해주지 않고 경영일선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있다가 형제의 난이 일었고, 한진그룹 역시도 조양호 회장이 후계자를 정해 놓지 않은 상황에서 타계하면서 남매분쟁이 일고 있는 것을 미리 방지하는 차원이라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이번 한국테크놀로지그룹의 승계 과정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조현범 사장이 아버지 지분을 매입하기 3일 전인 지난 6월 23일 한국테크놀로지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한국타이어테크놀로지 대표이사를 사임하면서 내부 안정에 의심을 갖는 눈초리인데요.

이를 두고 회사 측은 현재 진행 중인 항소심에 집중하기 위한 것이란 설명입니다. 조현범 사장은 납품업체로부터 매월 수백만원씩 총 6억여원을 챙기고, 이와 별개로 계열사로부터 매월 200만~300만원씩 총 2억6500여만원을 차명계좌로 받아 챙긴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으며 실형은 면했지만, 검찰 측이 항소해 2심 재판을 앞두고 있습니다. 조현범 사장의 경영권은 재판 결과에 따라 향방이 달라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현행법에 따라 5억원 이상의 횡령·배임을 저지른 경영진은 회사경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법적 판단이 아니라도 도덕성에 타격을 받게 돼 경영활동이 순탄치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조희경 이사장의 성년후견 심판 청구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는 의견에 무게가 실립니다. 그 이면에는 현재 한국테크놀로지그룹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장남 조현식 부회장이 있는 것으로 재계는 분석합니다. 결국 조현범 사장과 조 사장을 제외한 3남매(조현식, 조희경, 조희원)의 싸움이라는 설명인데요.

하지만 지분 경쟁에서는 조현범 사장과의 대결이 버거운 수준입니다. 그렇지만 국민연금(7.74%) 등 주요주주들의 힘을 빌린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3남매와 국민연금의 지분을 합치면 38.71%에 이르고 소액주주 지분(17.57%)을 끌여들일 경우 42.90%인 조현범 사장과의 지분 싸움에서 승산이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테크놀로지의 경영권 향방은 이른바 개미들에 달려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제는 3남매 연합군이 지분 경쟁에서 승리하더라도 2심 재판이 걸려있는 조현식 부회장 역시 도덕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현식 부회장은 현재 둘째누나 조희원씨 아들의 희귀질환 치료를 돕기 위해 회삿돈 1억1000만원을 부당하게 지원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데요. 조 부회장은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옛 한국타이어) 대표이사 사장으로 근무하던 2014년 1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이 회사에 근무한 적이 없는 조희원씨가 미국법인에 근무하는 것처럼 꾸며 가공급여를 지급한 혐의(업무상횡령)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1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2심이 진행 중입니다. 2심에서는 조희원씨가 증인으로 출석할 예정입니다.

조양래 회장은 이런 자식들 간의 분쟁을 염려해 승계작업을 마무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혼란은 막지 못하게 됐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경영권 승계가 문제는 문제인데요. 이러다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 경영권 향배를 사법부의 판단에 맡기는 촌극이 유행처럼 빚어지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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