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볼루셔너리 로드’ 흔들리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자기 조정 [영화와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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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볼루셔너리 로드’ 흔들리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자기 조정 [영화와 경제]
  • 김경훈 칼럼니스트
  • 승인 2023.12.07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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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한 장면. /사진=드림웍스픽처스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한 장면. /사진=드림웍스픽처스

GE·포드·보잉·록히드·IBM·인텔·마이크로소프트·애플·구글·엔비디아. 지난 수십 년 동안 혁신을 일으키며 공황과 전쟁, 인플레이션 등의 위기를 기회 삼아 성장해 온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들이다. 왜 유독 미국에서만 혁신기업이 끊임없이 출현하고 있는 것일까? 월가는 모종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1950년대 포디즘이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하고 에니악 컴퓨터가 대량 자료처리 시스템을 가동해 공공서비스 부문의 효율성을 높여가고 전후 군수산업의 의사결정시스템이 거대 프로젝트를 효과적으로 제어하게 됨으로써, 미국이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을 때 중산층은 권태라는 늪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가계·기업·사회·국가 각각의 층위에서 벌어지는 경제순환 주기에서 개인들 또한 자유롭지 못하고 교차로 신호등에서 좌회전하기 직전 문득 느끼게 되는 공허가 우리를 미루나무 가지에 매달린 잎사귀처럼 미풍에도 흔들리게 할 때, 세상은 경고한다. 인플레이션이든 전쟁이든 공황이든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경제의 기초는 견고하다는 미신 혹은 자기암시 속에서 권태를 유희나 리비도에 기초한 키치적 취향이나 덕후적 기호로 대체하며 향유할 수 있는 부르주아와는 달리 밑밥이 될 수밖에 없는 기층 민중이나 카지노자본주의의 탈락자들은 신용불량자라는 호모 사케르로 전락한다.

우리로 치면 판교쯤 해당하는 뉴욕 근교의 ‘레볼루셔너리 로드’라는 다소 생뚱맞아 보이는 이름은, 대혁명을 주도했지만, 이제는 미국의 부르주아들에게 압도당하고 있는 유럽의 부르주아를 조롱하며 유럽식 불확실성(지정학적 리스크, 통합 정부의 부재 등)을 자본주의 시스템 내부에서 해결하는 기획에 확신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 핵심은 공급과잉 된 노후 산업을 구조조정하기 위해서 파산비용을 최소화하고 혁신기업에 낮은 비용으로 자본을 조달하는 것이다. 결국, 자산화된 고정비용의 레버리지가 부채 레버리지를 상쇄시키는 시점에서, 방법적 파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공황은 경기순환 주기 안에 내재화한다.

이제 노동자들은 젊음을 다 바친 사업장의 급격한 붕괴를 숙명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월가의 은행가나 펀드 매니저는 거의 신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월가의 신들이 경기순환이라는 풍차를 돌릴수록, 자의식 약한 미국의 프티 부르주아지들마저도 획득 신분인 계급이나 계층에 대한 상승 지향 혹은 탈주나 탈피라는 상상계적 욕동마저도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환기하게 된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이제 전 지구적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내에 모든 경제 주체들은 주기적인 공황과 전쟁, 그리고 그사이 어디쯤엔가 피어오르는 파시즘을 회피하기 위한 방법적 파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월가가 전쟁이나 공황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은 오래된 일이다. 그들은 다만 파시즘의 광기 혹은 계몽이나 서구 문명의 합리성에 깃든 종말적 대량 학살의 가능성에만 몸을 사린다.

또한 월가의 기지 역할을 하는 미국이 유라시아대륙을 다루는 전략적 방향은 고립주의와 개입주의의 변증법적 범주로 전망할 수 있다. 먼저 트럼프식 고립주의는 유라시아 대륙 내부의 분쟁과 갈등이 고조될 때까지 두 개의 전쟁(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나아가 세 번째 전쟁(한반도) 모두에서 한발 물러나 단지 봉쇄정책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겠다는 것이고 그에 반해, 바이든식 개입주의는 유라시아대륙의 패권 다툼에 직접 개입해 미국이나 월가의 대리인을 선택하고 그 대리인이 승자가 되도록 관리하는 것이며 따라서 세 번째 전쟁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세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하고 승리하는 최초의 제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2차 세계대전(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한국전쟁은 사실상 연속된 세 개의 전쟁이었고, 이미 그들은 세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하며 승리한 경험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세 개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고 맞이한 황금시대에도 국가나 사회가 방법적 파국에 따라 경제 활력의 쇠퇴를 경기순환주기에 맞춰 산업구조의 개편으로 자기 조정하는 반면, 자본주의 사회의 개인들은 몸에서 떼어버릴 수 없는 병증(sinthome)인 권태, 특히 프티 부르주아지들은 계급상승 욕구와 주이상스(jouissance)의 충돌에 더욱 시달리게 된다.

부르주아지들이 대부분 예술을 향유하는 것에 익숙할 뿐 직접 예술가가 되는 경우는 많지 않은 데 비해, 프티 부르주아지들은 주이상스의 대가로 지불하는 시간과 머니, 그리고 상처를 감당하기 힘들어하므로 스스로 예술가가 되어 세계(혹은 상징계의 기존 질서)와의 불화를 해소 혹은 승화시키려고 한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케이트 윈슬렛은 집 앞 어귀에 서 있는 나무를 밀어내며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놀랍도록 적확히 보여준다. 공허함이 표정과 몸짓에 그대로 배어 나온다. 그것이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에서 비롯된 것인지 전쟁에 승리한 제국의 시민들이 짊어지게 되는 불안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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