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마이 무녀와 황무지, 사월은 잔인하다 [오인경의 그·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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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이 무녀와 황무지, 사월은 잔인하다 [오인경의 그·말·이]
  • 오인경 후마니타스 이코노미스트
  • 승인 2023.04.15 1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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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웁니다.

……

- T.S. 엘리어트, 『황무지』

/사진=이미지투데이
/사진=이미지투데이

봄이 시작되는 사월을 일년 중 가장 잔인한 달로 영원히 각인시켜버린 『황무지』는 현대시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다. 사월은 비단 영국의 시인에게만 잔인한 달이 아니었다. 이 땅에서도 4·19 학생 운동과 끔찍한 세월호 참사가 바로 라일락 꽃향기가 아른거리는 사월에 일어났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유명한 시의 첫 구절을 듣고나서 그 시가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를 좀 더 깊게 파고든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 작품이 발표된 건 지금으로부터 1세기나 거슬러 올라간 1922년이었다. 마침 그해에는 20세기 문학의 주춧돌과도 같은 작품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아홉 번째 권 『소돔과 고모라 Ⅱ』,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등.

이 무렵에 등장한 문학의 새로운 형식이 소위 모더니즘이다. 그들 문학작품이 비판하는 건 특히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황폐한 사회였다. 자본주의 사회란 곧 소유에 모든 가치를 두는 '탐욕으로 점철된 사회'였다. 한국 사회도 코로나가 창궐하던 지난 몇 년 동안 사상 유례없이 풀린 과잉 유동성 때문에 '탐욕이 홍수처럼 넘실대던' 모습을 곳곳에서 목격했던 터였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사진=이미지투데이

서울의 몇몇 특정구역에서만 초강세를 유지해오던 집값이 마침내 활화산처럼 분출하기 시작하자 이내 ‘마용성’을 넘어 ‘노도강’으로 용암이 흐르듯 들끓었다. 증시라고 예외일 리 없었다. 코로나 덕분에 진단키트 관련주가 바닥에서 스무 배씩이나 치솟더니 곧이어 비대면 수혜주들이 주도주로 득세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대장주가 ‘10만 전자’를 향해 거침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10만 양병설은 일찍이 들어봤으나 그 10만이 전자 앞을 수식하는 증시 유행어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주린이를 가르치겠다는 주식 전문가가 대거 나타나 유튜브 채널을 순식간에 점령했고, 급조된 수퍼개미 채널이 우후죽순 생겨나 수많은 투자자의 이목을 끌었다. 그야말로 '탐욕이 넘쳐흐르는 시대'가 광범위한 영역에서 펼쳐졌고, 이런 흐름에 제때 탑승하지 못한 사람을 지칭하는 신조어까지 생겨나더니 코스피는 어느새 3300포인트를 넘어섰다. 그런 광란은 2021년 여름까지 지속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어느새 괴물로 자라난 인플레를 때려잡기 위해 각국은 빅 스텝에서 자이언트 스텝까지 거침없는 긴축 행보를 이어왔다. 금리는 어느새 지난 십수 년간 구경조차 하지 못했던 수준으로 급상승했고, 초저금리와 신용팽창으로 달아올랐던 부동산, 주식, 가상화폐 등은 급속도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탐욕스럽게 자산시장으로 몰려든 수많은 투자자는 늘어난 빚과 이자 부담, 쪼그라든 집값과 주식 평가액에 망연자실한 채 미래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걱정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이만하면 됐다 싶은데도 미국 주도의 금리인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사진=이미지투데이

지난 겨울이 유난히 추웠던 만큼 새봄은 유난히 따스하기를 학수고대했건만, 올해는 이상하리만치 벚꽃마저 일찍 피었다가 차가운 봄비 앞에 한순간 다 져버리고 말았다. 사월이 언제 잔인하지 않았던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으랴만 올해도 따사롭게 고이 흘려보내진 못하는 듯하다.

이쯤에서 T.S.엘리엇의 시를 다시 한번 펼쳐보자. 앞서 인용한 그 유명한 시구절 앞에 이상한 제사가 하나 놓여있다.

 

황무지(荒蕪地)

한번은 쿠마이 무녀가 항아리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지.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어.

"죽고 싶어"

-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1. 죽은 자의 매장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웁니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지요.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남겨 주었습니다.

……

 

도대체 쿠마이 무녀는 왜 항아리 속에 매달려 있을까? 그녀는 왜 '죽고 싶어' 안달일까? 그 사연을 짧게 풀어 요약하자면 이렇다. 쿠마이의 무녀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데 그녀의 이름은 시뷜레였다. 그녀는 몹시 뛰어난 미모 때문에 아폴론으로부터 구애를 받으면서 '먼지 알갱이 수만큼 많은 생일'을 선물로 얻는다. 하지만 '그 세월이 줄곧 청춘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깜빡하는 바람에 끝없이 늙어가면서도 죽지 못하는 슬픈 운명을 겪는다. 아폴론과 시뷜레의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그린 명화들을 찾아보면 쉬빌레의 미모에 깜짝 놀라게 되는데, 엘리엇의 『황무지』에 담긴 늙고 쪼그라든 이미지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무녀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천장 벽화에도 어엿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녀는 무척 늙었으나 여성스러움을 잃어버리고 남성처럼 우람한 근육과 힘을 갖춘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다시 한번 우리를 놀라게 만든다.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화가가 시뷜레를 천장 벽화에 그려넣은 건 그녀가 로마 건국 신화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고대의 온갖 영웅들이 활약했던 10년 동안의 트로이아 전쟁에서 마침내 트로이아가 패망하자 트로이아 장수 아이네이아스는 불타는 트로이아를 빠져나와 간난 신고 끝에 이탈리아 땅에 도착하는데, 그때 지하세계로 내려가 죽은 아버지의 혼령을 만날 수 있도록 가이드를 맡은 예언녀가 바로 시뷜레였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천장 벽화. 맨 오른쪽 상단에 쿠마이 무녀가 보인다. /사진=이미지투데이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천장 벽화. 맨 오른쪽 상단에 쿠마이 무녀가 보인다. /사진=이미지투데이

대개 영웅들은 지하 세계에 한번씩 다녀와야 진짜 영웅으로 거듭난다. 오르페우스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저승에서 데려오다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그녀를 다시 잃었지만, 꾀많은 시지프스와 힘센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 등은 저승에서도 능히 빠져나온다. 로마 건국 신화의 주인공인 아이네이아스는 결정적으로 쿠마이의 무녀 시뷜레 덕분에 아버지의 혼백을 만나게 되고, 닥쳐올 새로운 전쟁에서 어떤 위험을 겪어야 하는지도 미리 훤히 알게 되었다. 시뷜레의 도움으로 저승 투어를 무사히 끝낸 아이네이아스가 너무 고마운 나머지 그녀를 여신으로 모시겠다고 하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자신은 아폴론의 사랑을 외면한 때문에 벌써 일곱 세기를 보냈지만, 자신의 나이가 먼지 알갱이 수와 같아지려면 아직도 삼백 번의 포도 수확을 더 보아야 한다면서.

그렇다면 엘리엇은 도대체 왜 『황무지』라는 시의 제사에 뜬금없이 쿠마이의 무녀를 등장시켰을까? 하버드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유럽으로 건너간 엘리엇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은 뒤 런던의 하층 계급이 영위하는 삶을 보면서 탐욕으로 점철된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와 서구 사회의 불모성을 절감한다. 엘리엇이 『황무지』라는 시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주제 또한 쿠마이의 무녀가 겪은 '삶 속의 죽음(Death in Life)' 상태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황무지』의 제1부 '죽은 자의 매장'에서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의 죽은 자들의 행렬을 꼭 빼닮은, 매일 아무런 생각없이 아침 9시에 울리는 종소리에 맞춰 출근하느라 바삐 런던 브릿지를 건너는 사람들의 행렬을 그렸다.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은 불모(不毛)의 '황무지'로 보일 수밖에 없었고,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년 찾아오는 봄비와 꽃향기 가득한 사월은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황무지처럼 '잔인'하기만 할 뿐이었다.

아폴론의 사랑을 받아 오래도록 행복한 삶을 이어갈 수도 있었던 쿠마이의 무녀 시뷜레가 신의 사랑을 외면한 대가로 얻은 건 결국 '죽음 같은 삶의 오랜 지속' 뿐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간절히 죽음을 원하는 이유는 '소생과 구원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고대 신화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가 늘상 그러하듯 모든 존재는 꼭 한 번은 죽어야만 새로운 삶으로의 재탄생을 기약할 수 있었으니, 시뷜레 또한 그런 희망을 위해서라도 간절히 죽음을 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음울하고, 아무런 가망도 없이, 노쇠하고 상실감에 사로잡힌, 그런 무력감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한 희망'이 완전히 내던져진 게 아니라는 느낌은 쿠마이 무녀의 '죽고 싶어'라는 말 속에도 숨어 있는지 모른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사진=이미지투데이

우리 사회도 코로나가 기승을 부린 지난 몇 년 동안 황무지처럼 메마르고 황폐해진 분야가 결코 적지 않다. 갑작스레 매서운 겨울바람처럼 들이닥친 고금리 환경은 자산시장의 급격한 가격조정으로 이어졌다. 소생이 필요한 곳이 비단 자산시장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조각나고 해체되어 무력화된 온갖 다양한 영역들이 어서 빨리 봄을 맞은 대자연처럼 소생하기를 바라본다. 올해 따라 대지를 적시는 봄비마저 유난히 싸늘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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