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교육, ‘구원’을 감지할 수 있다면 [김경훈의 시네노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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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 ‘구원’을 감지할 수 있다면 [김경훈의 시네노믹스]
  • 김경훈 영화칼럼니스트
  • 승인 2026.07.03 11: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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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참교육’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참교육>이라는 넷플릭스 드라마 제4화의 끝부분에, 성적 조작을 주도한 교사가 몇 해 전 똑같이 성적 조작의 희생양으로 삼았던 여학생과 마찬가지로 죄수복을 입고 취조실에서 마주치는 장면은 이 드라마의 야심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 여학생이 중학생이었을 때 날아온 암전(暗箭)은 그녀의 삶을 뒤틀어버린다. 그 학생은 이후 그녀 자신의 실제 성적과는 다른, 원하지 않던 학교에 진학하고 그녀 역시 어느 한 교사를 억울한 죽음으로 내몰리게 한다.

둘 사이의 대화는 묵음으로 처리되고 취조실 문에 난 좁은 창문 안쪽에서는 여학생이 분노에 차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 할 말 없는 교사에게 소리치며 따져 묻는 모습이 비친다.

여기에서 다른 사람의 삶에 함부로 힘을 가한 자는 말할 것도 없이 묵묵부답하는 교사이다. 그는 중학생 여자아이에게 무언가 선택할 기회도 주지 않았고 다른 길을 제시하지도 않았고, 일방적으로 그녀의 꿈과 계획을 무너뜨리고 훼손한 것이다.

그녀가 고등학교에 올라가 유튜버 인플루언서가 되었을 때 영향력과 책임이라는 변증법적 관계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기에는, 이미 그녀의 에고가 상징계의 질서 체계에서 번번이 미끄러지고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손을 내밀었을지라도 그 호의가 조응할 수 있는 분별력은 성근 주체와 세계의 불화 속에서는 쉽게 발휘되기 어렵다.

그녀의 분노가 정당하지 않다고 달리 말할 수 없겠지만 원망보다는 후회가 밀려오는 밤바다의 파도 소리처럼 밤을 지새우게 했을 것이다. 인과의 굴레 안에 발을 들여놓은 그녀는, 타자로서 인플루언서라는 허상에서 벗어나 진정한 주체로서의 삶이라는 환상의 누빔점을 향해 상어 같은 항해를 하든지 이끼 같은 삶을 구성하든지 해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간교한 교사로부터 그의 균형 맞춘 자기방어 기제를 허물어트리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급하게 쌓아 올린 방어기제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알아채야 한다. 그는 입을 열지 않겠지만, 그 침묵이 보내는 신호의 수신자가 누구인지 깨달아야 한다.

성적 조작의 수혜 학생일 수도 이른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학연 혹은 학벌 공동체일 수도 있다. 군사부일체라는 가치 규범은 이제 거의 형해화했지만, 그 학벌 공동체는 매력 없는 동아시아적 집단주의의 한 축이다. 당연히 그녀 혼자 해체할 수는 없겠지만 충분히 경고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입 다물고 있게 하는 욕망의 대상이 처음부터 교육감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신성적 조작이라는 침묵의 카르텔이 사실은 상당히 광범위하다는 것은, 내신성적과 수시전형이 대체한 것이 이른바 촌지임을 안다면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음서제나 미국식 기부금 입학을 인정할 수 없는 근대 교육제도의 핵심 가치인 공정한 대학입시는, 봉건적인 신분제사회의 잔여물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은폐하기 위한, 아무리 씻겨나가도 계속해서 쌓을 수밖에 없는 위선의 모래성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참교육’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의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그래서 그의 침묵이 과시하는 자신감은, 학부모와 학교 당국 그리고 학원 사업자들로 이루어진 삼각 카르텔이 보수 진영이든 진보 진영이든 어떤 입장이나 혹은 어떤 방향이나 구별 없이 교육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하는 계몽의 본질이, 결국 획득 신분인 계급을 둘러싼 욕망의 대회전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실패를 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동산 정책이 무주택자 등의 이기심을 촉발하지 않게 하는 것이 즉 포모 증후군을 완화하는 것이 성패의 관건이라면, 교육정책은 삼각 카르텔의 이기심을 드러내게 할수록 다른 말로 위선을 걷어낼수록 해결에 가까워진다.

최근 수년간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은 현격히 감소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출생률의 감소는 탁아나 학원 사업에 대한 지속적이고 연속적인 타격으로 이어질 것은 명백하다. 이른바 국민교육이 품고 있다는 전체주의적인 속성은 ‘견강부회’(牽强附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사실 모든 폭풍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부모들의 욕심이고 그 욕망은 성취 계급을 향해있기 때문에 오히려 학습권을 둘러싼 개인들의 창발은 극대화되어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취학 연령에 있는 아이들의 감소는 즉, 교육 수요의 감소는 오히려 교사들의 이해를 위협하는 요소라고 보아야 한다. 그들은 여전히 신화화된 사회적 신분의 후광에 머물러 있고 싶겠지만, 욕망의 집중도 혹은 교실의 과밀화가 부모 세대에 비해 극적으로 완화(65대 1에서 25대 1)되어 있다는 현실은 중장기적으로 교사의 수를 감소시켜야 한다는 즉, 교육 공급을 줄여야 한다는 직관을 준다.

일차적으로 기간제 교사 제도를 사실상 폐지해야 하고 다음엔 정규 교사의 수를 줄여야만 혹은 교사들의 재교육으로 교육의 질을 높이거나 해야만, 욕망의 스프레드로 인한 스트레스가 완화될 것이다.

또한 학부모의 지갑에서 나가는 수업료가 교사들의 급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교직을 성역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는, 교사들이 짊어져야 하는 사표(師表)로서의 책무(예. 독일 자동차산업이 붕괴하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교정에 세워진 수많은 외제 차를 단순히 개인의 취향이나 선호로 치부하지 않는 등)에 대해 숙고하거나 아니면, 희생양이 필요한 현재의 위선적인 시스템을 유지하든지 하는 수밖엔 없다.

어느 해 해남에 간 적이 있다. 제주도 가는 배를 기다리던 항구 앞 다방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그녀의 웃음소리뿐>이었다. 목포 근해로 태풍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콘크리트 길바닥엔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만큼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먹구름이 하늘을 덮은 오후에 불어오는 바람엔 가끔 그녀의 웃음소리가 묻어있었고, 어느 날 그 웃음소리가 무엇을 구원하는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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