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동안 켜켜이 쌓아 올린 평화롭고도 안정적인 동업 관계가 파국을 맞으면 온갖 갈등과 부작용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오랜 동업 관계가 지속되면 혈연관계 못지않게 순탄한 결별을 어렵게 만드는 여러 장벽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회피하기 어려운 결별을 앞둔 이해당사자들을 더욱 힘들고 비참하게 만드는 건 갈등의 틈바구니를 노리고 잇속을 챙기려는 투기자본의 개입이다. 고려아연 쟁탈전에 갑작스레 등장한 MBK파트너스도 오랜 동업 관계의 순탄한 청산을 돕는다기보다는 서로의 갈등을 부추기는 힘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돈이 되기만 한다면 무슨 일에든 끼어들기를 서슴지 않는 약탈적 투기자본이 사모펀드의 근본 속성이니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그걸 마냥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강제로 기업을 뺏고 빼앗기는 적대적 M&A 과정에서도 전쟁의 규칙만큼은 지켜졌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온갖 지략이 총동원되는 전쟁 같은 싸움을 치르더라도 정당한 경쟁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불법행위만큼은 엄격하게 감시받을 필요가 있다. SM(에스엠) 공개매수 경쟁 과정에서 불거졌던 시세조종 행위와 총수 구속 사태가 또다시 재발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적대적 M&A는 흔히 전쟁에 비유된다. ‘전쟁론’을 학문으로까지 격상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은 프로이센의 장군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였다. 그는 나폴레옹 연합군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 원정을 감행했을 때도 현역으로 그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가 쓴 <전쟁과 평화>에도 실명으로 잠깐 등장한다. 나폴레옹 군대와 싸운 ‘조국 전쟁’에 관한 대서사시를 남기기 위해 톨스토이가 얼마만큼 전쟁 관련 서적들을 깊이 탐구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클라우제비츠가 남긴 유명한 문장 가운데 하나는 “전쟁은 정치의 한 도구이며, 정치의 연속이다”라는 말이다. 정치적인 해결이 끝내 한계에 봉착할 때 전쟁이 발발하고, 그 전쟁 또한 정치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얘기다.
고려아연과 영풍 MBK 연합 세력과의 M&A 전쟁 또한 온갖 자원이 총동원되는 실제 전쟁과 무척이나 닮았다. 양가 가문 사이에 쌓인 갈등이 더 이상 정치적인 해결이 불가능한 국면으로 넘어가면 전쟁의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이미 올해 3월 열린 정기주총에서부터 사사건건 충돌하고 표 대결을 펼치더니 기어코 현대차 그룹이 증자에 참여한 ‘제3자 배정 신주 발행’에 대해 무효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이번에 장형진 고문이 MBK파트너스와 손잡고 기습적인 공개매수에 나선 모습은 마치 외국의 용병부대를 끌어들여 자신의 조국을 공격하는 모습과도 닮았다. ‘고려아연 쟁탈전’은 자세히 살펴볼수록 실제 전쟁과 닮았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75년 동안의 든든한 동업 관계가 굳건하게 유지된 원동력은 양가 가문 사람들의 ‘공동 소유와 공동 경영’ 정신이 남달리 투철했기 때문이다. 그런 체제에 조금씩 변화가 싹트기 시작한 건 창업 3세인 최윤범 회장이 고려아연의 경영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한 2019년 무렵부터다. 40대의 젊은 나이에 중책을 떠맡은 최 회장은 비철금속 일변도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놀라운 변신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이름하여 ‘트로이카 드라이브’다. 니켈 제련을 비롯한 2차전지 배터리 소재 산업, 폐자원 리사이클링 사업, 그린 수소를 포함하는 신재생 에너지 등 미래 신성장 사업 분야에 활발하게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최 회장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과 잇따라 파트너십을 맺고 자본을 맞교환하거나 신규 자본을 유치하기에 이른다. 이런 과정들이 결국 만년 열세였던 고려아연의 지분율에 지각 변동을 불러오고 끝끝내 ‘고려아연 지분 쟁탈전’으로 비화하고 만 것이다.
기나긴 추석 연휴와 곧바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휴일들을 앞두고 마치 군사작전처럼 기습적으로 감행된 ‘공개매수 선언’은 MBK파트너스라는 초거대 사모펀드의 참전으로 순식간에 한국 증시를 거대한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고려아연뿐 아니라 핵심 계열사인 영풍정밀까지도 로켓처럼 주가가 수직으로 치솟았다. 영풍정밀을 따로 제쳐두고 고려아연을 온전히 차지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영풍정밀은 간단히 말해서 적에게 빼앗기는 순간 전쟁의 양상이 뒤바뀌고 마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셈이다. 영풍정밀이 오래도록 소유해 온 고려아연 지분 1.85%(38만2508주)가 어느 쪽으로 넘어가느냐에 따라 삽시간에 3.7%포인트의 지분 차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영풍 MBK 연합의 공개매수 선언 이후 ‘글로벌 넘버원 비철금속 제련업체’ 고려아연 쟁탈전을 둘러싼 보도들이 연일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공격 진영과 수비 진영에서 이번 전쟁에 끌어모은 자금 규모만 하더라도 무려 6조원에 달할 정도니 이토록 대규모로 진행되는 ‘쩐의 전쟁’이 언제 다시 펼쳐지겠는가. 내로라하는 로펌의 법률가들이 매일이다시피 소송전에 나서기 시작하자 온갖 보도 매체가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듯 엄청난 양의 기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무렵 전혀 다른 이유로 분주히 뛰어다닌 인물은 백척간두에 놓인 고려아연을 지휘하는 최윤범 회장이었다. 풍전등화와 같은 엄청난 위기에 처한 고려아연을 지키느냐 빼앗기느냐가 오롯이 그의 리더십과 지략에 달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최윤범 회장 측의 대응과 반격은 실로 놀라웠다. 촉박한 대응 시간과 턱없이 부족한 자금력 때문에 MBK에 정면으로 맞서 대항하기엔 역부족이라는 예상들이 팽배했지만, 무려 3조원대에 달하는 자사주 매입 소각 방안이 고육지책이자 묘수로 제시된 것이다. 자금력으로는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MBK파트너스에 정면으로 대항하기 어려워지자, 아예 발행 주식을 태워 없앰으로써 상대방이 활개 칠 공간 자체를 없애버리는 놀라운 전술을 꺼낸 것이다. 마치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백만 대군에 맞서 싸우던 제갈량이 턱없이 부족한 화살을 적군을 속여 빼앗고, 절대적으로 열세이던 군선들을 화공으로 불태워버리는 지략과도 닮은 데가 엿보였다.
예상 밖으로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영풍 MBK 연합 세력은 한차례 기각당한 ‘자사주 매입 금지 가처분’ 신청을 곧바로 다시 꺼내 들고 나섰다. 이른바 ‘전쟁의 기술’에 흔히 등장하는 모략의 기술(사실과 거짓을 섞은 정보를 유포하라)을 닮은 전략이 제시된 것이다. 최 회장 측의 자사주 매입 한도 위반 가능성을 내세우는 한편 차입금을 동원한 대규모 자사주 매수 행위가 배임에 해당할 수 있다며 고려아연 이사진을 압박하고 나섰다. 최 회장 측도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장형진 고문 측이 MBK와 맺은 ‘경영협력계약’이야말로 원천무효이자 배임이라며 형사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MBK 측의 공개매수신고서를 살펴보면 경영협력계약에 관한 설명이 곳곳에 언급되어 있지만 정작 핵심 내용이 빠져있다는 느낌도 든다. MBK파트너스는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영풍 MBK 연합세력이 보유하는 주식 총수의 ‘50%+1주’를 영풍 측으로부터 넘겨받게 되는데, 이때 구체적인 콜옵션 행사가격이 ‘공개매수 신고서’ 어디에도 명시된 게 없다. 영풍이 보유한 핵심 자산인 고려아연 주식의 현재 가치는 4조3362억원(526만2450주, 10월 18일 종가 기준)에 이른다. 이 가운데 상당량이 언젠가는 MBK 쪽으로 넘어갈 예정인데, 구체적인 매각 단가(콜옵션 행사가격)조차 명시하지 않은 공개매수 신고서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번 공개매수를 통해 영풍 MBK 연합이 확보한 주식 수를 모두 더하면 796만4417주에 이른다. 이 가운데 영풍 측이 장차 MBK에 넘겨줘야 할 주식 수는 ‘절반+1주’에 해당하는 398만2210주에 이른다. 이 물량을 전부 (주)영풍에서 떠맡을 리는 없겠지만, 안분 비례 방식으로 MBK에 매각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58%에 해당하는 물량을 MBK파트너스에 팔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영풍이 현재 보유 중인 고려아연 주식 수(526만2450주)의 58.0%는 305만5169주이며 지난 18일 종가 기준으로는 2조5175억원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