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과 영풍의 ‘헤어질 결심’에 필요한 덕목 [오인경의 그·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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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아연과 영풍의 ‘헤어질 결심’에 필요한 덕목 [오인경의 그·말·이]
  • 오인경 후마니타스 이코노미스트
  • 승인 2024.05.08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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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년 동안 끈끈한 동업자 관계를 이어오던 영풍·고려아연 그룹이 점점 더 빠르게 결별하는 모양새다. 이미 지난 3월에 열린 주주총회를 앞두고도 최씨 가문과 장씨 가문은 사사건건 충돌을 겪어왔지만, ‘공동 소유와 공동 경영’이라는 기본 틀을 무너뜨릴 만큼은 아니다. 주총에서 충돌했던 안건조차도 정관 일부 변경과 배당 문제로 국한됐다. 상대방 가문의 사람들을 이사회에서 아예 축출할 정도로까지 정면충돌하지는 않았던 셈이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사진=이미지투데이

관심이 집중됐던 주총이 최씨 가문의 판정승으로 일단락되자 사정은 다시 급박하게 뒤바뀌는 흐름이다. 주총 특별결의 사항인 정관변경 안건은 주주총회를 통과하지 못했으나 배당금 지급 안건은 최씨 가문의 주장대로 통과되면서 ‘최윤범 회장 체제’가 한층 탄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여건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그룹 내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고려아연의 제1대 주주인 영풍 입장에서는 고려아연의 경영권뿐 아니라 소유권까지 위협받는 상황에 내몰리자 급기야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꼬투리 삼아 반격했다. 영풍은 고려아연 주총이 끝난 지 불과 이틀 만에 ‘신주 발행 무효의 소’를 제기했다. 지난해 현대자동차그룹의 해외 계열사에 배정한 신주 발행이 경영상 목적이 아닌 최씨 가문의 ‘경영권 유지·확대’를 목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무효라는 주장이다.

영풍이 무효 소송을 제기하고 나서자, 고려아연 경영진의 대응은 한층 거침없고 과감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아연 생산량 세계 1위인 영풍과 고려아연의 원재료 조달과 국내외 판매를 오래도록 전담해 온 핵심 계열사인 서린상사를 통해 거센 반격에 나섰다. 원재료 공동구매 등 영풍과의 거래를 전면 중단하겠다고 통보한 데 이어 서린상사의 이사진 개편을 위해 주총 소집까지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최윤범 회장 체제의 고려아연은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고려아연이 43년 동안이나 영풍과 함께 쓰던 논현동 영풍빌딩에서 아예 빠져나와 서린동으로 사옥을 이전하는 단계로 나아간 것이다. ‘한 지붕 두 가족’ 체제를 상징하는 요소들을 아예 원천적으로 제거하겠다는 자세다. 이 밖에도 최씨 가문과 장씨 가문 사이의 크고 작은 갈등은 계속 이어졌다. 아연과 납을 제련하는 과정에 부산물로 나오는 황산을 처리하는 문제로도 갈등을 겪고 있다. 영풍이 운영 중인 석포제련소에서 나오는 대규모 황산을 도맡아 처리해왔던 고려아연이 공장 부지가 협소하다는 이유 등으로 더 이상 받아줄 수 없다고 나선 것이다. 가뜩이나 실적 부진과 석포제련소에서 빈발하는 근로자 재해 사망 사고 등으로 곤란을 겪어온 장씨 가문 경영진으로서는 동업자 관계가 파탄지경에 이르면서 겪는 문제들이 얼마만큼 곤란한지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영풍 장형진 고문(왼쪽)과 고려아연 최윤범 회장.
영풍 장형진 고문(왼쪽)과 고려아연 최윤범 회장.

고려아연은 지난 3일 주주환원을 위해 자사주를 1500억원 규모로 매입하겠다고 공시했다. 매입 목적은 ‘주식 소각 및 임직원 평가보상 등’이다. 주주라면 누구나 반길 만한 ‘주주환원 정책’임에도 영풍 측은 이 공시마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영풍은 공시 당일 저녁에 ‘특정 주주의 지배력 강화에 악용될 수 있다’라며 고려아연의 공시 내용에 즉각 반발했다. 고려아연은 정부의 밸류업 정책 발표 이전에도 자발적으로 주주환원 정책을 수립하고 꾸준히 주주환원율을 높여 왔던 기업이다. 그런데도 영풍은 일반 통념에서 벗어난 갖가지 이유들을 내세워 고려아연의 결정에 반박하고 나섰다. 75년째 동업자 관계였던 두 집안 사이의 감정의 골이 얼마만큼 깊은지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영풍은 “정부와 국회에서 자사주를 활용한 경영권 강화에 제동을 걸고 있는 만큼 고려아연이 이번 ‘임직원 평가 보상’을 위한 자사주 매입 결정을 철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주장한다. 또한 “자기주식 매입 후 소각 비율, 임직원 지급 대상과 규모, 지급 기준 및 시기 등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지 않아 논란이 예상된다”라며 “취득한 자기주식을 누구에게 얼마나 지급할 것인지를 이사회 또는 소위원회가 임의로 정하게 될 것이므로 특정한 주주의 지배력 강화에 남용될 우려가 있다”라고도 주장했다.

​영풍은 특히 “고려아연의 경우 최근 최대주주인 영풍이 ‘신주 발행 무효의 소’를 제기하는 등 경영권 분쟁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특정 주주의 지배력 강화에 악용될 수 있는 자사주 매입 안건을 의결한 것은 시점상으로도 부적절하다”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고려아연은 장기간 소각하지 않고 보유 중이던 자사주 6%를 한화에너지와 LG화학 등 전략적 파트너에게 넘긴 바 있었다. 장씨 가문과 최씨 가문의 고려아연 지분율이 오래도록 ‘장씨 가문 절대 우위’ 상태에서 순식간에 ‘박빙’으로 돌변한 계기도 자사주 맞교환에서 비롯된 게 사실이다. 고려아연은 2022년부터 지난해에 걸쳐 최윤범 회장 주도로 신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금력이 풍부한 전략적 파트너들을 다수 끌어들였다. 일련의 자본 유치 과정이 결국 최씨 가문의 지배력 강화 목적으로 진행됐다고 영풍 측이 뒤늦게 문제 삼고 나선 셈이다.

고려아연의 현재 시가총액은 9조6807억원이며 시가총액 46위에 달하는 세계적인 금속 제련 업체이다. 최근 건설경기를 비롯한 전방 산업의 경기 침체에 따른 아연 값 하락 등으로 주가 흐름이 부진하지만, 고려아연은 여전히 세계 최고의 탁월한 금속 제련 기술을 보유한 우량 기업이다. 2022년 11월에 최씨·장씨 두 가문의 지분 경쟁이 시작될 무렵만 하더라도 고려아연의 시가총액은 23위까지 치솟은 바 있다. 양사는 경영권 분쟁이 본격화된 이후 합산 시가총액이 무려 4조원 이상 감소한 상태다. 두 가문 사이의 지분 경쟁이 도리어 기업가치를 파괴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어서, 지분 매입 경쟁이 지속되는 와중에도 시가총액이 도리어 줄어드는 형국이다.

/그래픽=오인경
/그래픽=오인경

영풍과 고려아연 사이에 경영권 분쟁이 본격화된 이후 시가총액 변화를 살펴보면 고려아연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최씨 가문 쪽이 장씨 가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듯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고려아연은 시가총액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때보다 25.9% 감소한 반면, 영풍의 시가총액은 무려 49.2%나 감소했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기준으로 살펴보면, 고려아연의 시가총액은 9조6807억원으로 영풍의 7405억원보다 13.1배까지 격차가 크게 벌어진 상태다.

/그래픽=오인경
/그래픽=오인경

고려아연과 영풍이 75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단단한 동업자 관계를 유지해 오다가 최근 급작스럽게 경영권 분쟁에 휘말린 까닭은 무엇일까. 외견상으로는 고려아연의 미래 신사업 진출을 둘러싼 두 가문 사이의 견해 차이 때문으로 보인다. 비철금속 제련 일변도였던 고려아연의 경영권이 창업 3세인 최윤범 회장으로 넘어간 시점부터 고려아연은 과감한 변화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40대의 젊은 나이에 고려아연을 떠맡은 최윤범 회장은 부임 직후부터 50년 이상 집중해 온 ‘금속 제련 사업’ 일변도에서 과감하게 탈피하는 변화를 모색한다. 그 결과, 그린 수소를 포함하는 신재생 에너지, 니켈 제련을 비롯한 2차전지 소재산업, 자원 리사이클링 등 미래 신성장 사업 분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양한 사업 파트너들을 끌어들이고 대규모 자본을 유치하기에 이르렀다.

고려아연의 미래 성장 전략. /자료=고려아연 홈페이지
고려아연의 미래 성장 전략. /자료=고려아연 홈페이지

지난달 말 기준으로 고려아연의 지분 구조를 살펴보면 두 가문 사이의 지분 경쟁이 앞으로 얼마만큼 더 치열하게 전개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두 가문 사이의 보유 지분 차이는 불과 0.04%포인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난 정기 주총을 앞둔 시점에 두 집안 사이의 지분율 차이는 0.15%포인트까지 좁혀졌는데, 주주총회 이후로도 양쪽 모두 지분율을 더욱 확대한 결과 두 가문 사이의 지분율 차이가 0.04%포인트까지 극적으로 좁혀진 것이다. 양쪽의 지분율 차이가 너무나 초박빙이어서 놀랍다. 75년 동업자 관계의 종말이 어떤 모습일지 현재로서는 도무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양상이다.

/그래픽=오인경
/그래픽=오인경

그래픽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고려아연=장씨 일가 소유’라는 공고한 틀이 허물어진 데에는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의 ‘신사업 진출을 통한 자본 제휴’가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장씨 가문의 입장에서는 이토록 짧은 기간에 ‘고려아연 지배주주’의 위치마저 위협받을 줄은 차마 예상하지 못했을 듯하다. 왜냐하면 장씨 가문의 고려아연 지분율은 창업 초기부터 줄곧 32% 전후를 유지해 온 데다가, 장씨 가문의 지분율에 비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최씨 가문의 지분율에 비춰볼 때, 단기간에 최씨 가문이 자신들과 대등한 수준으로 지분율을 끌어올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면 장씨 가문이 경영하는 영풍은 이미 오래전부터 고려아연과는 경쟁 자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경영 성과에서 상당한 격차를 보여왔다. 동업자 관계이자 계열 자회사인 고려아연이 끊임없는 기술 개발 등을 통해 세계 최고의 금속 제련 기술을 확보하는 동안 영풍은 기술 개발에 소홀했을 뿐 아니라 ‘제련소 환경오염 문제’조차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당국으로부터 조업 중단 제재를 받아왔다. 심지어 제련소 내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일도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그만큼 경영진의 마인드가 안일하면서도 부실했다고 볼 수 있다.

영풍 석포제련소. /사진=영풍
영풍 석포제련소. /사진=영풍

오랜 동업자 관계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양측이 주고받는 날 선 공방들을 바라보는 투자자들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기업 본연의 목적을 위해 쓰여야 마땅할 자원과 에너지가 상대방을 향한 비난과 헐뜯기에 소모될수록 기업의 가치는 점점 더 추락하기 쉽기 때문이다.

고려아연을 둘러싼 양측의 주장들은 나름대로 근거는 있으나 대체로 장형진 고문 측의 주장이 너무 지나치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왜냐하면 고려아연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장 평균을 훨씬 웃도는 배당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왔으며, 꾸준히 고배당을 이어온 근본적인 이유 또한 경쟁사에 비해 월등한 경영 성과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지난 주총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은 배당정책만 하더라도 주주환원율이 선진국 평균에 가까울 만큼 충분했다. 그보다 더한 배당을 요구한 영풍 측의 주장은 트집 잡기에 불과한 셈이었다.

최씨 가문과 장씨 가문의 경영권 다툼이나 지분 경쟁은 양가 집안의 명운이 달린 중차대한 사건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고려아연에 투자한 주주들의 입장에서 보면, 최씨든 장씨든 누구라도 경영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들이 기업을 떠맡아 훌륭하게 이끌어줬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장기간 경영 성과 비교, 최씨 가문 창업 2세들이 개발해 온 독보적인 금속 제련 기술, 젊고 유능한 창업 3세 최윤범 회장의 신사업 추진 방향 등을 두루 감안하면 장형진 고문 측의 주장에 적극 동조하는 주주들이 많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두 가문의 지분율 차이가 초박빙인 현재 상태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될 전망이어서 도리어 그 점이 걱정이다. 지분 경쟁이 치열할수록 온갖 계열사들을 무리하게 동원하여 지분 확보 경쟁을 계속할 가능성이 그만큼 크고, 상대방을 향한 반박과 비난도 점점 더 치열해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동업자 관계를 맺어온 두 집안이 ‘헤어질 결심’에 이르는 데는 실로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끝내 결별할 수밖에 없을 때 남은 과제는 오래도록 이어온 동업 관계를 원만하고도 지혜롭게 잘 마무리하는 것뿐이다. 상대방을 향해 도를 넘는 비난을 퍼붓고 이전투구식으로 싸워봐야 양쪽 모두 상처만 깊어질 뿐이기 때문이다.​

호메로스가 쓴 양대 서사시를 펼치면 온갖 인간 군상들이 총망라하다시피 등장한다. 10년 동안 이어진 전쟁에서 맹활약한 인물들은 셀 수도 없이 많지만, 임기응변에 최고로 능한 인물은 단연 오디세우스였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로도 10년 세월을 더 방랑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고향 이타케로 귀향한다. 그가 온갖 유혹과 위험을 극복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이미 지나간 일들에 대해 미련을 두고 연연해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10년 여정의 막바지에 다다른 곳은 파이아케스족이 사는 스케리아 섬이었다. 그곳엔 훌륭한 통치자와 아름다운 공주 나우시카가 살고 있었다. 그곳이야말로 트로이를 떠나 귀향길에 오른 오디세우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낙원 같은 장소였다. 오디세우스는 그곳에서 온갖 환대를 받았으나 결코 그곳에 안주하지 않는다. 자나 깨나 돌아가야 할 궁극의 목적지인 이타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동업자 관계가 마침내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울 때, 독일 철학자 니체가 남긴 잠언을 한 번쯤 떠올려 보면 어떨까.

파이아케스 섬을 떠나는 오디세우스. /출처=위키백과
파이아케스 섬을 떠나는 오디세우스. /출처=위키백과

​사람들은 오디세우스가 나우시카와 이별했을 때처럼, 그렇게 이별해야 한다. ㅡ 연연해 하기보다는 축복하면서. -니체 <선악의 저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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