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의 세상물정] ‘망치’ 든 물리학자, 그리고 ‘통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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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의 세상물정] ‘망치’ 든 물리학자, 그리고 ‘통섭’
  • 김범준 편집위원(성균관대 교수)
  • 승인 2019.12.16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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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다양한 학문분야가 있다. 자연과학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개별 분야의 과학자는 각기 독특한 시각으로 자연과 세상을 본다. 과학자는 분야로 나뉘지만 이들 과학자가 바라보는 자연에는 경계가 없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봤더니 작은 것들의 세상에서 '생물학자 출입금지' 팻말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 없고, 눈을 들어 올려본 하얀 구름에도 '기상학자외 출입금지' 표시는 보이지 않는다. 학문의 경계는 자연의 실제 모습이 아니다. 과학의 발전과정에서 등장한 인간의 허상일 뿐이다.

궁금한 무언가가 있을 때, 과학자는 자신이 갖추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연구의 도구를 꺼낸다. 망치를 들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는 영어 속담처럼, 물리학자는 물리학의 도구를, 화학자는 화학의 도구를 꺼내, 이를 가지고 자연을 이해하려 한다.

가진 게 망치밖에 없는 사람에게 톱을 꺼내 쓰라고 강요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당신이 바라보는 대상이 못이 아닐 수 있다고, 톱을 든 옆 친구가 알려주는 것이 더 낫다. 더 좋은 방법도 있다. 망치를 든 사람, 톱을 든 사람, 다양한 제각각의 도구를 든 사람들이 둘러 앉아 어떻게 여러 도구를 함께 이용해 ‘대상의 이해’라는 공통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지 마음을 열고 토론하는 방법이다.

자신이 가진 도구가 남들이 가진 도구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름을 틀림으로 오해하는 것일 뿐이다. 내 망치가 소중하다면 다른 이의 손에 들린 톱도 마찬가지로 존중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필자는 물리학자다. 자연현상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일부에도 물리학의 시각을 적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물리학자다.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 변환공식을 이용해 사람의 몸무게를 에너지로 변환할 수 있다는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물리학의 정량적이고 체계적인 접근 방식을 사회현상 일부에 적용하면 대강의 이해는 가능할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모든 사회현상을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복잡다단한 사회현상 중 작은 일부를 이해하는 데 물리학의 접근방식이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필자는 물리학 안에서 통계물리학이 전공이다. 입자든 사람이든 많은 구성요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을 때, 전체가 보여주는 통계적인 패턴의 이해가 주된 관심사다.

큰 지진이 일어난 다음 작은 규모의 여진이 보여주는 통계적인 패턴을 급격한 주식시장 폭락 이후의 주가 변동과 비교하고, 우리 사회를 뒤흔든 엄청난 뉴스 이후 쏟아지는 후속 기사의 분포와도 비교할 수 있다. 지진, 주식, 뉴스처럼 다양한 현상을 통계물리학의 연구방법을 적용해 큰 틀에서 일관된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필자가 가진 ‘망치’에 해당한다.

서로 상이한 현상을 통계물리학의 통합적인 시각으로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여지도 많다. 지진의 예측이 어려운 이유를 주가의 예측이 어려운 이유로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고, 사람들 사이에서 거짓 뉴스가 전파되는 패턴을 전염병이나 옷차림의 유행이 퍼져나가는 패턴과 비교해 이해할 수도 있다.

특수상대론 논문을 발표한 1905년, 아인슈타인은 이리저리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브라운 운동에 대한 논문도 발표했다. 브라운 운동을 하는 물리적인 입자의 운동방정식은 주식시장의 주가의 움직임에 성공적으로 적용되기도 했다. 다양성에서 유사성을 찾아 통합적인 시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개별적인 현상의 이해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융합적인 성격의 연구가 다른 과학 선진국에 비해 잘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필자 혼자만은 아니리라. 정부에서, 여러 학문분야의 사람들을 모아 대학에 융합학과를 만드는 것을 지원해서 융합연구를 장려하기도 했다. 이렇게 융합적인 성격을 가지는 학과를 만들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융합연구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망치를 든 사람은 망치를 든 사람들하고만 모여서 얘기하는 것을 더 편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작정 모아놓으면 오래지 않아, 사람들은 그 안에서 또 끼리끼리 모이려 한다. 모아놓았다고 융합연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는, 이해하고자 하는 중요한 현상을 먼저 제시하고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여러 분야의 사람이 자발적으로 모여 서로 소통하는 방식이 성공적인 융합연구를 위해 더 나은 방법일 수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맞닥뜨리는 많은 문제는 다양한 요소가 얽히고설켜 있다. 특정 분야의 연구자가 주어진 복잡한 문제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질 것임이 분명하다. 더 넓고 더 깊이 이해하려면 다른 여럿이 모여 두루 소통할 일이다.

내가 잘 아는 분야에 관심을 보이는 다른 분야의 과학자가 있다면, 경계할 일이 아니라 감사할 일이다. 여러 학문 분야의 연구자들이 함께 모여 자유롭게 소통하는 과학 연구의 열린 문화가 우리 사회에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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